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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이글은 저가 쓴 글이 아닙니다.  미국의 대학생 운동을 이끌었던 유태인 마루쿠제의 행복의 철학을 정리하여 놓은 책을 요약한 것을 저가 옳겨 놓왔습니다.


행복의 철학 L.마르쿠제(Ludwig Marcuse) 지음 ;

이재희 옮김 창우사 1993

 

 

 

1. 행복이란 무엇인가?

 

 

* 단순한 만족이 행복이 아니다.

 

 

 

독일의 동화 행복한 한스행복은 그대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한 젊은이를 그려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실로 대단한 발견이었다. 16

 

 

 

 

행복한 한스

 

한스라는 ,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한스가 주인님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 주인님 인제 저는 7년 동안의 일을 다 마치었습니다 "

" 그래, 장하도다 "

" 인제 7년동안의 값을,, "

" 그래 수고 하였다 , 그 대신 금을 주겠다 "

금의 크기는 한스의 머리 크기였습니다

" 금이 크군요 아무튼 주인님 안녕히 계십시오., "

" 그래 "

그렇게 한스는 길을 건넜습니다

한스는..

" 드디어 어머니를 뵐수 있겠구나 ! "

한스는 가벼운 걸음으로 가였습니다

그런데 참 조금씩 가보니 한스도 지치었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말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탄 사람이

" 자네는 왜 그렇게 허리를 구부정하게 해놓고 가는가? "

" 이 큰 금을 들고 가서 그러네 "

" 그러면 그 큰 금과 이 말을 바꾸지 않겠는가? "

" 그러면 되겠네? "

둘은 그렇게 가였습니다

한스는 아무 힘도 안들이고 말을 타고 가였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빨리 가서 넘어져버렸습니다.

그때 말을 계속 달렸고 앞에 가던 한 사람이 잡아주었습니다.

" 나 아니었으면 이 말도 없었을걸요. "

한스는

고맙습니다. 그런데 인제 주인을 내팽개치는 그런 말은 싫군요 "

그럼 저의 이 암소와 바꾸지 않겠습니까?? "

그러죠 "

둘은 그렇게 바꾸고 갔습니다 그렇게 가다가 한스는 목이 말라서

암소의 젖을 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안 나왔습니다.

그래서 쎄게 짰습니다.

그런데 암소가 갑자기 화가 나서 그런지 뒷발로 한스의 얼굴을 집어차였습니다.

뒤에서 오던 돼지를 들던 한 아저씨가

" 그 소는 너무 늙어서 젖을 못내, 그러니 소고기로 먹어, "

" 저는 소고기를 싫어합니다 "

" 그러면 나의 돼지와 바꾸지 않겠는가? "

" 그렇게 합시다. "

그렇게 둘은 바꾸었습니다 또가는데 이번에는 급하게 거위를 들고

가던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 비켜 비켜 "

" 어디를 그렇게 빨리 뛰어가오?? "

" 교회에 가오 거위를 고기로 쓸려고 하오 살을 얼마나 찌게 하여 비계 천지로

만들었던지 허허 "

" 돼지가 더 살이 많을텐데.. "

" 에에헴,, 의장님이 돼지가 한 마리 없어졌다는데 ., 그것이 그 돼지와 쏙 빼 닮았소,

지금 막 사람들을 풀었다는데. "

" , 그러면 이 돼지와 거위를 바꾸지 않겠소 "

" 에헴, 이러면 안되는데 하지만 위기에 빠진 사람을 모른 척 할 수 없지,

그렇게 하소 "

그렇게 둘은 바꾸었습니다 한스는 혼잣말로

" 히히, 거위의 고기를 일단 먹고 비계는 나중에 기름으로 쓰고

깃털을 배게로 쓰면 되 겠군, "

그리고 기뻐하며 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위를 들고 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 왜 가위를 들고 가고 있으십니까? "

" 이 가위로 말하자면 나를 도와주어 금을 왕창 벌게 해준 생명의 은인이오.

그런데 왠 거위를 들고 가오?. "

" 사실 나는 7년의 상금으로 금을 받고 그 금으로 말과 바꾸었고 말을 소와 바꾸었고

소를 돼지와 바꾸었고 돼지를 거위와 바꾸어 이 지경에 왔소 "

" 그러하오? 당신은 참 하느님 도와주는군, 그런데 이 가위는 금을 왕창 벌게 해주오.

그 거위는 딱 먹고 끝을 내지만 이 가위는 금을 계속 벌게 해주오 "

" 그러면 그 가위와 이 거위를 바꾸면 안되겠소? "

" 그럽시다 "

그러면서 아저씨는 바꾸고 숫돌과 돌을 주었습니다 이것으로 돈을 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가였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마침 우물이 보였습니다

한스는 기뻐하며 달려가서 물을 마시려 하였습니다 .

그런데 가위와 숫돌 둘이 다 빠지었습니다 한스는

" 차라리 잘되었어, 하느님이 참 나 편하라고 여러 번 도와 주시는구나 "

한스는 물을 먹고 가벼운 마음으로 싹 털어 놓고 행복하게 가였습니다

 

 

 

행복에 도취한 사람들, 행복의 예언자들, 행복에 대한 선구자들은 예로부터 인간에게 행복을 단념하게 한 두 가지 오류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그 오류 중의 하나는, 불행이란 현존재의 결정적인 사실이고, 그 불행이 저지된 상태야말로 행복이라는 사고 방식이다.

플라톤이 전하는 이 이론은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말하기를, ‘행복을 찾고 있는 자, 행복이 있다는 망상을 품은 자는 불행에게 문을 열어주는 데 불과하며, 행복한 삶이란 바로 그 행복을 추구하는 부질없는 노력으로 해방된 삶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20

 

 

*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불행의 시작이다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의미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특히 관념론 철학자들 사이에 많이 있다.

이는 물론 행복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부인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행복이나 불행을 구태여 논의한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행복이나 불행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을 먹을 때나 어떤 문제를 해결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좋은 것을 굳이 배척할 필요는 없다. 행복은 참으로 좋은 부록(附錄)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단지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1

 

저마다 행복이란하고 말했을 때 본인은 비록 자각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게 있어 행복이란하고 말한 것이다.

행복한 삶의 역사는 자기의 행복을 탐구하고 발견한 그 사람들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행복에 대한 정의를 구하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독자에게 분명히 경고하고자 한다. 자기 자신을 어떠한 전형(典型)이나 표본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자기를 어떤 전형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자기를 속이는 일이다. 남의 행복에 말려들어가 자신의 행복을 놓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형 속에 행복에 대한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는 목숨이 있는 한, 갖가지 생활 방식을 통해 많은 종류의 행복을 몸소 살아 왔으며, 또 행복에 대해 생각해 왔다.

지금 우리들은 모두 그 은혜를 입을 수 있다. 27

 

행복한 삶을 단념하는 사람은 현존재를 성취시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자질에 따라 새로운 행복의 변주곡이기 때문이다. 28

 

2. 행복을 구할 권리

 

행복해질 가치가 있는 자만이 행복해질 수 있고,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만이 불행하게 되는 걸세. 학교나 교회에서 가르친 바를 훌륭하게 지키면 행복해질 수 있네. 왜냐하면 저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 미덕에 대해 행복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이지……

이에 대해 욥이 목소리를 높여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자, 친구들은 그의 말을 별로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네는 하느님만이 알고 있는 일을 자네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세계의 지배자가 정당한 심판관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욥이 범하지 않은 죄까지 만들어냈다.

불행한 인간은 분명히 나쁜 점이 있을 걸세.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

그러나 욥이 계속 자기의 정당함을 주장하자 그들은 마침내 나중에 말하려고 남겨 두었던 말을 했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정당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자 욥이 친구들에게 외쳤다.

어차피 정당할 수 없는 것이라면 미덕 따위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러자 친구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욥의 불행을 정당화하고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에게서 벌을 받은 인간은 행복한 거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행해. 그러나 그것은 새처럼 드높이 올라가기 위해서야.” 35

 

자네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면 나도 알고 있네. 자네들의 지혜는 내게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네. 만일 자네들이 내 입장이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자네들의 위로나 비난으로 내 고통이 없어지리라고 믿는가? 오히려 그 반대인 것이네.

그러니까 제발 나를 성가시게 굴지 말게. 자네들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자네들이 잠시 입을 다물고 내 말을 주의깊게 들어주는 거네. 어쨌든 나의 불행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 주게. 그러나 자네들은 그렇게 못할 걸세.

자네들은 겁쟁이기 때문에 나의 절박한 질문에 대해 공연히 허튼 소리로 얼버무리려고 하는 걸세.“ 37

 

* 맹목적인 복종의 보상으로 얻은 행복

 

욥의 이야기에는 본질을 드러내는 주목할 만한 내용이 들어 있다. 우리는 불행에 어울리는 인간일까, 아니면 행복에 어울리는 인간일까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대한 질문은 언제나 불행해졌을 때 비로소 생긴다. 순조롭게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욥도 행복했을 때는 한 번도 그러한 자기의 생활에 의문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는 누구보다도 신을 공경하는 마음이 두터웠다. 그는 쓰러진 사람이 있으면 일으켜 세워 주었고 떨리는무릎에는 힘을 빌려 주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자기보다도 부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자기보다도 나쁜 사람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또 만일 그러한 사람들이 자기보다도 나쁜 사람이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자기보다도 부족한 생활을 한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자기가 그런 사람들과 같은 입장에 놓여지자, 그는 친구들의 위로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는 반기를 들었다. 영혼의 밑바닥에 깊은 상처를 입고 그는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경건하고 착한 것은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발견하기 위한 용기, 그리고 이러한 발견을 하기까지의 고뇌로 말미암아 그는 인간으로서의 영웅이 되었고 최고의 인내자가 될 수 있었다. 44

 

 

3. 최초의 행복한 철학자

 

 

인간의 행복은 (이것이 욥이 도달한 의문의 결론이다) 무서운 악마의 변덕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10. 행복한 사회주의자

 

 

* 사회주의는 행복으로 가는 길인가?

 

 

 

영국의 산업 혁명이 어떤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는가?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젊은 프리드리히 잉겔스가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지만, 이 비참한 상황을 거짓으로 위장하여 기만하지 않았던 최초의 사람이 로버트 오웬이었다.

그는 목면의 생산에만 혈안이 되지 않았다. 생산에 종사하고 있는 인간에게도 정신을 쓴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가 혹은 무엇이 생산에 종사하는 이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었는가 하고 반문했다.

그것은 하느님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바로 인간의 사회가 그 장본인이다.”

 

그는 행복에 이르는 도정에서 불행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존재, 즉 사회와 부딪치게 되었다.

그에게는 인간 사회를 비난하여 할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로버트 오웬이 어렸을 때, 부모의 친구들이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로버트가 두 살 연상인 형보다도 글씨를 더 잘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형제에게 받아쓰기 경쟁을 시켰다. 이긴 것은 로버트 쪽이었다. 이날부터 형은 그전처럼 친절하지 않았다.

 

어른이 된 로버트 오웬은 이 사건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머릿속에도 간직해 두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계기로 미움이나 질투나 오만의 뿌리를 파헤쳤다. 220

 

 

 

 

그는 모든 해악은 경쟁에 의해 남을 해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세계 아래서는(경쟁 때문에 매일 몇 천 명이라는 적을 만들어내는 사회에서는) 행복의 꽃은 키워질 수가 없었다. 이것이 그의 온 생애에 걸친 통찰이었다.

그는 개인의 이해와 개인의 이해, 국가의 이해와 국가의 이해를 충돌시키는 이 불합리하고 비참한 사회에 반대하여, 개인과 개인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조화만이 오직 행복을 낳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령 사람이 어떠한 확신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은 본인 마음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미친 압력 중에서 가장 강한 것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감정이나 이념을 낳는 것은 자연이 아닌 인간이라는 대리인이다. 인간을 많건 적건 간에 소외된 늑대로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이라는 대리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늑대의 본성이 주입된 관계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221

 

 

로버트 오웬은 면직물 대신에 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데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했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실로 많은 이유 때문에 그에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의 반대들을 보면 행복한 사회의 모든 적의 유형을 알 수 있다.

맨처음 그에게 반대한 사람은 뉴 라나크에서 거래하던 사람들이었다. 공장은 돈벌이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곱사동이 애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반대 이유였다.

다음에는 그의 공장의 노동자들이 반대했다. 첫째 그들은 스코틀랜드 인들이어서 영국인인 오웬을 불신하기 때문이었는데, 자본가가 베푸는 선행의 배후에는 착한 뜻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케롤리느도 반대했다. 아내는 그가 인류에게 보내는 그의 사랑이 그의 가족으로부터 모든 사랑을 빼앗아가 버릴 것이라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상류 계급의 사람들도 모두 그에게 반대했다. 이유의 절반은 그가 그들에게 불리한 법률을 제정하여 직접 손해를 끼치기 때문이며, 나머지 절반은 그의 방향 자체가 전혀 그들에게는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메테르니히의 비서로 정치 논문을 쓴 프리드리히 겐츠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오웬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아주 명쾌하게 말했다. “우리는 대중이 풍요해지고 독립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지배할 수 있단 말인가?”

같은 말을 많은 성직자들(멜더스 일파의 사람들)도 했으나, 단지 표현만 다소 품위가 있을 따름이었다.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신을 가르칠 권리가 없으며, 하늘과 땅의 지배자에 의해서 짧은 일생을 교양없는 노동자로서 살도록 만들어진 인간에게는 공장주라 할지라도 다른 인생을 살도록 할 권리는 없다.”

또 멜더스 학도들도 겉보기에는 제법 학문적이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구는 일정한 수의 인간밖에는 부양할 수 없으므로 전쟁과 가난은 하늘이 만든 경제학의 좋은 법칙이다. 어리석은 공장주 오웬은 그와 같이 현명한 경제의 법칙에 화를 내려는 것인가.” 222

 

 

 

 

1817년 여름 어느 날 오웬은 시티 오브 런던 터번의 광장 연단 위에 서서 청중들에게 말했다.

 

친구들이여, 여러분은 지금까지 행복이란 어떤 것인가를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그가 바야흐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서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이제부터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나의 인생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나는 실로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청중들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행복이란 정말 무엇인가? 인간이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을 방해하는 폭군은 누구인가? 그것은 조직화된 종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까지 항상 개인과 개인 사이에 적의를 낳게 한 원흉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며,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에 이르는 길을 저지해 온 것은 바로 성직자들이었던 것입니다.” 225

 

 

 

 

오늘날 그의 열정이 많은 독자들에게 우스꽝스러운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아마 나중에 화형의 장작더미가 그의 정당함을 증명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당시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것이 오늘날 우리의 해석으로는 근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짐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교회는 인간이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창조된다고 하는 크나큰 통찰을 얼마나 비밀스럽게 숨겨 왔던가. 인간은 맨 처음에 신 혹은 자연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그후 그가 속하는 사회에 의해서 또 한 번 창조된다.

그리하여 사회에 의해서 언어종교습관이 강요된다. 인간이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 탓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 때문인 것이다. 226

 

 

1825225, 그는 미국 대통령 존 퀸시 애덤즈와 그가 거느리는 미국 정부의 장관, 의회 의원 및 몇 사람의 재판관에게 자기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신대륙 땅을 밟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는 평화와 인간 연대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새로운 국가의 건설에 모든 나라 중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재능이 풍부한 사람들이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인류의 행복한 미래를 오하이오 강의 지류인 워바슈 강 기슭에 건설하기로 했다. 그는 이 행복의 거류지에 뉴 하모니(새로운 조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자 많은 미국인들이 물었다.

누가 그런 울 안으로 가려고 하겠는가? 혼자서 노력해도 끝없는 가능성이 있는 이 세상에서 말씀이야. 거기에 가려는 자는 게으름뱅이들뿐이겠지.”

처음 몇 달 동안에는 천 명쯤 찾아왔다. 온갖 출신 성분과 갖가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228

 

 

처음에는 아직 평등 분배의 원칙에 따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각자는 일에 따라, 즉 과거의 행복하지 않았던 사회에 있었을 때와 거의 같은 액수의 돈을 받았다.

그곳 거주지의 신문은 창간호에 이런 구호를 내걸었다.

각기 다른 머리를 조화시킬 수는 없다 할지라도 마음만은 하나로 하자.”

이 머리와 마음의 분리는 행복을 약속할 수 없었다. 229

 

 

그는 인간 속에 숨겨져 있는 가능성과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를 잘못 파악했기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현실은 어떤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는가 하면, 가령 이런 꼴이었다. 18255, 토마스 피어스와 그의 아내인 사라는 행복한 사회의 건설에 참가하기 위해 일곱 명의 자녀를 데리고 피츠버그의 자기 집을 떠났다.

피어스 가족은 많은 편지를 고향에, 특히 큰아버지인 베이크웰과 그의 부인에게 보냈다. 6월에 쓴 최초의 편지에 이미 그들이 지금 만들어 내려 하고 있는 행복한 사회에 대한 감격보다도 그들이 남겨 두고 떠난 불행한 사회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모두들 희망에 부풀어 있답니다. 다만 이를 악물고요

 

7월에 피츠버그로부터의 답장이 뉴 하모니에 도착했다. 가까이에서 보면 형편없는 것도 멀리에서 보면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큰아버지 내외도 아주 단순한 소박한 사람들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모든 질문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써보냈다.

너희들이 있는 곳에서도 벌어들인 만큼 모두 제 주머니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하고 있느냐?”

외부 세계의 사람들은 쉽게 감격하고, 그것은 아름다운 표면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답니다. 로버트 오웬은 다시 영국으로 갔습니다. 그가 돌아오면 모든 일이 제대로 잘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오래 걸리겠지요. 그리고 한 마디 덧붙여서 큰아버님의 질문에 대답하면, 모두들 자기 주머니에 돈이 들어올 때보다 진지하게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아요.” 230

 

 

 

 

18285월의 어느 일요일에 로버트 오웬은 고별 연설을 했는데, 그는 이 실험 때문에 그의 모든 재산을 잃었다. 그러나 행복한 사회에 대한 신념은 잃지 않았으며 또 그의 소박함도 잃지 않았다.

실패로 끝난 행복의 실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 실험에 따라 증명될 예정이었던 주장이 잘못이었거나, 혹은 실험자가 실험을 잘못 했거나의 그 어느 편이라고.

그런데 실패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한편에는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플라톤이 좌절하고 오웬이 좌절한 데서 명확해진 바와 같이, 요컨대 인간은 본질적으로 행복한 사회에서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플라톤이나 오웬도, 또 이 두 사람 사이의 시대나 오웬 이후의 많은 사람들도 실험가로서 너무 졸렬했다. 따라서 실험이 실패한 것은 그들 탓이지 인간 본성 때문은 아니다 라고.

오웬이 범한 기본적인 실수는, 피어스 부인과 같은 여성의 경우 얼마 전까지 피츠버그에서 보냈던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가를 그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피어스 부인이나 그녀와 운명을 같이 한 친구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미지의 생활로 끌어들이려면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몸에 배인 습관을 일시에 버린다는 것은 당장 행복을 주기는커녕 심한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233

 

 

 

분명히 오웬은 계몽의 시대라고 불리는 그의 시대와 보조를 맞추어 통찰과 의도를 과대평가하고, 습관의 힘과 전통의 무게를 과소평가했다. 이를테면 이런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는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다. 실지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234

 

 

11. 행복에 이르는 비밀

 

 

* 인생에 대처하는 네 가지 방법

 

 

그 무렵 톨스토이는 인생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인간을 네 가지 그룹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첫째 그룹은, 반은 깨어 있고 반은 잠자면서 일생을 지나쳐 버리고 마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예로서(당시는 러시아 봉건 시대의 말기였다) 대부분의 여자들, 많은 젊은이들, 그리고 모든 어리석은 자들을 들고 있다.

 

두 번째 그룹은 나쁜 의미에서의 쾌락주의자들이다. 이 그룹의 예로서 그는 그가 잘 알고 있는 귀족의 자제들을 들었다. 그들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마음대로 먹고 마시며 여자를 사냥하고 오만불손하며 그리고 장님인 채 늙고 병들어 죽음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톨스토이 자신도 예전에는 그러한 무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탐욕과 거드름을 피우는 생활에 그는 이미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밖에 다른 길은 없을까?

그는 고통에 찬 실험을 몇 번이고 되풀이한 후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근본으로부터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자예술가성자에 대한 그 나름의 관념 속에서 아주 먼 옛날 부처가 보냈던 인생을 자신의 귀감으로 삼고 그와 같이 뛰어난 부정자(否定者)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 세 번째 그룹, 행복하고 신성한 현자 속에 자신을 끼워넣을 수는 없었다.

 

그는 네 번째 그룹, 즉 약자들의 무리 속에 자신을 참여시키고 있었다. 이 그룹의 사람들은 분명히 진리를 알고 있고 또 무엇이 필요한가도 알고 있으며 톨스토이가 살고 있는 인생은 결코 행복과 결부되지 않으리란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보다 나은 지식에 의해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힘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순간부터 톨스토이는 통찰과 삶과의 일치에서 행복을 찾기에 이르렀다.

그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마음으로부터 소망하고 있던 생활 방식으로 살고 있지 않은 데서 지옥과도 같은 불행을 겪었다. 왜냐하면 그는 40년 동안에 걸쳐 대가족의 신분에 걸맞는 생활을 보장해준 백작이라는 최고의 귀족으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246

 

 

 

 

* 행복한 삶에의 용기

 

 

사회주의는 무의식적인 그리스도교이다라고 그는 말하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탄생도 사회주의의 탄생도 모두 행복에 대한 의지에서 발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어떤 종류의 독재이건 독재는 모두 부당한 것으로 거부했다.

마르크스의 예언이 실현된다면 전제 정치의 계속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따름이다. 그때에는 현재 자본가가 지배하듯이 다른 지도자들이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톨스토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격렬하게 반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각광을 받고 있던 또 하나의 행복에 대한 길까지도 거부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가상의 독재였다.

몇백만 명의 독자를 행복으로 감싼 19세기 최대의 소설가가 그 자신은 아름다운 가상으로 된 그 넓은 세계에서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 또 그가 이 아름다운 가상을(그것이 자기에게는 구원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끔찍한 기만이라고 노골적으로 증오했다는 것, 이것은 아마 그의 행복한 삶을 찾는 역사에 있어 가장 흥미로운 특성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만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골몰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훌륭한 소설을 더 많이 썼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 옳다고 한다면, 그들의 말은 모두가 옳다. 왜냐하면 톨스토이는 탁월한 소설가였으나 시대의 문제성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는 재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선전가들은 살아 있는 실체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멋진 상품에 대해서만 마음을 쓰고 있기 때문에, 톨스토이의 동경이라든가 행복구원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긴 만일 그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러한 개인적인 일들을 제품 완성을 방해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자신의 위대한 예술 작품에서도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작품이 그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목표는 어떤 문제를 반론의 여지 없이 해명하는 일이 아니다. 모든 점에서 자기가 표명한 사고방식대로 인생을 사랑하도록 어쩔 수 없이 납득시키는 일이다.” 260

 

 

 

* 행복한 무정부주의자

 

 

 

그 자신 이 그리스도교적이라는 말을 아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185544일의 일기에서

그리스도의 종교란 내세에 있을 지복의 약속이 아니라 이승에서의 행복의 실현이 중요한 것이다.”

그의 의식 속에는 유물적 복음이라든가 유물주의적 그리스도의 삶등의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거의 40년이 지난 후에도 현세의 삶의 행복에 의해서 꽃피는 그리스도교를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현세라는 말은 그리 적합한 말이 아니다. 시험의 골짜기도 아니고, 보다 나은 영원한 세계로 이르는 중계지도 아니다. 현세란 우리가 같은 시대의 인간과 그 자손들을 위해서 보다 아름답고 기쁘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저 아름답고 기쁘고 영원한 것의 하나인 것이다.” 253

 

 

 

 

 

12. 행복을 부정하는 사람들

 

* 불행을 창조하는 행복한 사람들

 

 

불행그것은 특별한 이름을 가진 각양각색의 불행이 결합된 모자이크는 아니다. 치통이라든가 실연 혹은 슬픔 같은 것을 합쳐서 신화적 위대성에 도달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특별히 멋지게 한탄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고난을 견디며 또 고난을 말하는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수천년에 걸친 불행을 한몸에 짊어지고, 그것을 감동적인 멜로디에 실어 떠벌여 댔다. 265

 

 

불행한 사람들은 가령 자신의 불행을 극단적으로 과장함으로써 스스로의 마음을 가볍게 한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큰 소리로 울부짖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보다 큰 고통을 스스로 생각해 냄으로써 그에 대한 지배력을 갖게 되면 자기가 느끼고 있으면서도 지배할 수 없는 가장 약한 고통을 소멸시켜 버릴 수 있다.

 

 

인간이 고뇌 속에서 입을 다물 때

그때마다 신은 나에게

스스로의 괴로움을 말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노라

 

 

 

고뇌하는 피조물 괴테는 표현의 천재성으로 인해 고뇌를 표현하는 창조자로 변신했다. 미켈란젤로도 같은 순서를 밟아 스스로를 해방했을 뿐 아니라 더욱 행복하게 된 경위를 고백했다.

 

나는 죽음을 양식으로 해서 살고 있노라

그리고 내 생각이 옳은 것이라면

나는 정녕 내 불행에 의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사색가가 됨으로써 스스로의 마음을 가볍게 한 자도 있었다. 사색을 함으로써 고통이나 고뇌를 거쳐 가는 것이다. 고뇌하는 인간에서 사색하는 인간이 되며, 그 사색을 통하여 불행의 발자취를 거쳐가는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사실 불행에 대한 독자적 해명보다도, 적당한 거리를 둔 사색 속에서 평온을 얻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불행으로부터 구원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라 신학자 쪽이다.”

 

 

신을 인식하는 것이 모든 지성적 존재의 목표이다.

그런데 인간과 모든 지성적 존재의 목표는

행복이나 지복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성적 존재의 지복의 극한이나 행복의 극한은

신을 인식하는 일이다. 267

 

 

인식은 비참한 피조물을 고뇌에 찬 피조성(被造性)의 영역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인식은 영험이 분명한 부적(符籍)이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아주 젊었을 때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는 노시인 비란트와의 대화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이란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나는 인생에 대해서 철저하게 사색하는 것으로 인생을 보내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사색을 거듭했다. 그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욱 더 행복해졌다. 그는 72살 때 백살까지 살 것을 소망했다. 그에게 있어 사색은 불행이라는 화살을 막는 갑옷이었다.

 

부처는 불행의 근원을 묻는 이 질문에 현자의 고귀한 침묵으로써 대답했다. 우파니샤드도 아주 조심스럽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전에 존재했던 것 속에서 욕망이 눈떴다.”

268

 

 

만일 내가 전염병 치료나 교육 개혁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또 만일 내가 세계의 불행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것을 모조리 없애버리려고 결심한다면, 나는 그 불행에게 공통분모를 갖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 의인적(擬人的)인 것, 가령 악마라든가 혹은 추상적인 것, 이를테면 욕망 따위의 공통분모가 필요한 것이다.

불행에 머리가 하나밖에 없는 경우에만 나는 그것에 결정적인 명중탄을 쏘아 맞출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히드라인 경우에는 승산이 없다. 이 머리에는 이미 몇 가지 이름이 붙어 있다. 예를 들면, ‘이성무지또는 유물론계급투쟁따위이다. 269

 

 

 

 

* 행복한 사람불타

 

부처의 행복에 붙여진 인도 고유의 이름은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열반이란 단순히 무(), 즉 모든 불행의 제거만이 아니라 동시에 확고하게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며 더 나아가 충일로 이르게 하는 특별한 행복이다. 273

 

 

이 충일에 이르는 구원은 하루의 마지막 등불을 끌 때, 그리고 그 충일을 왜곡했던 하루의 계획이 사라져 갈 때 많은 사람들이 체험하고 있는 것들이다.

 

열반은 현세의 실체(實體) 체험이다.

등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듯이, 헐떡거리며 산정에 섰을 때 갑자기 온몸이 힘찬 숨결로 가득 찬다. (...)

이러한 구원은 산에 오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험할 수 있다. 꽃피는 들에 서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언덕의 능선에 시선을 준다. 그러면 구원의 행복이 바람이 되어 불어오는 것이다.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산꼭대기나 붉은 꽃이 피는 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행복에의 비상을 훈련에 의해서 터득하고, 소도구 없이 이룩했던 것이다. 그들은 위대한 시인과 마찬가지로 삶의 충일을 자기 속에 간직하고 있으며, 때로는 대지나 여러 감각은 자신의 행복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274

 

 

부처는 위대한 계몽가로서 결코 인생을 등진 허무주의자가 아니었다. 행복한 부처는 발을 얼음물에 담근 채 고통으로 떨고 있는 저 불행한 고행자들로부터는 아무것도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개구리나 거북이, 뱀이나 악어나 그 밖의 물 속의 생물들도 모두 극락으로 가게 되리라!”

이 행복한 부처는 모든 자기 학대를 거부했다. 그것은 학대받는 피조물을 불행으로 인도할 뿐, 열반으로 이끌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에피큐로스의 적은 아니었다. 그는 물론 행복으로 가는 길의 개척자도 아니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단지 순간적 환상이 아닌 절대적 자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열반의 행복한 상태가 일상의 상태로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삶을 부정하고 동시에 영속적인 삶을 살 수가 있는가?

이 역설은 그가 단지 불행(인생)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행복(인생)을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행복의 추구에 열중하는 사람은 부처 속에서 강력한 적을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어두움에 이름을 붙일 용기가 없었던 많은 망상가들보다 더욱 좋은 친구이다. 276

 

 

*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불행

 

 

그리스도교의 느끼는 법과 생각하는 법에도 불행이 지배하고 있다. 그것도 전면에 노출되어 있다. 탄식의 골짜기에 살며 무수한 괴로움을 맛보고 있다. (...)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골짜기에서는 불행한 삶만이 끝없이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행복이, 에피쿠로스나 세네카도 알지 못했던 적극적인 행복이 자라고 있었다.

 

이 행복은 피안의 확신 속에서 현실성을 획득했다. 행복한 부처의 매우 허약하고 아무것도 보증해 주지 않는 행복은 언제나 고승(高僧)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그리스도교의 피안은 견고하고 광대한 행복의 요새이며, 거기로 가는 길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 손발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틀림없이 도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불행의 부정이, 미래의 피안에 의해서 개개인의 현재에 주어지는 긍정적인 행복과 어떻게 융합했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 잘 그려져 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와 같이 온갖 고뇌를 짊어지게 된 자에게도 편안함이나 위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과일이, 자신의 십자가를 견딤으로써 익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몸을 내던짐으로써 시련의 모든 무거운 짐이 하느님의 위로의 확고한 신념으로 변화하게 된다. 육체가 학대받으면 학대받을수록 그만큼 더욱 정신은 내면의 은총에 따라 견고해지는 것이다. 278

 

 

1945년에 어떤 보험 회사가 다음과 같은 광고를 냈었다.

 

왕자로 태어난 부처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그 이름과 왕자와 상속권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를 버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 보험의 외무 사원을 만나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평화라는 말은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뜻을 잃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홍수를 버티어 내지 못한 댐을 개탄하듯이 그리스도교의 쇠퇴를 개탄해 왔다.

그렇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행복의 소멸에 대해서도 개탄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에피쿠로스의 위대한 찬양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리스도교 재건을 지향했으나 실패로 끝난 세기에 그리스도교도로서 살았던 두 사람, 니체와 톨스토이는 쾌락주의자였다. 279

 

 

 

13. 행복을 무시하는 사람들

 

* 불행으로부터의 탈출

 

 

 

욕망을 가지고 있더라도 스케일이 작은 사람은 항상 자기 손이 미치지 않는 것을 헐뜯으며, 탐이 나서 견딜 수 없는 감미로운 포도를 시다고 스스로 타이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대부분의 경우 별로 소용이 없다. 자기보다도 행복한 이웃 사람이 감미로운 포도맛을 즐기는 것을 우리는 매일 보고 있다. 그럴 때 자기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는 관념을 의연하게 가지고 있기란 그리 쉬운 노릇이 아니다.

이 경우, 개인적인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미치광이는 이런 불유쾌한 현실에 대해서는 안전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러한 현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정상적인 사람은 집단적인 광기에 의해서 구제가 된다. 집단적인 광기란 신학자나 철학자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들만이 광기를 진리로 높일 수 있고, 경험을 확고하게 묶어 놓을 수 있다.

그들은 필요하면 언제라도 달콤한 포도를 손도 대지 않고 신 포도로 바꾸어 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유혹으로부터 그 매력을 탈취하고, 만족할 수 없는 인간으로부터 본의 아닌 단념이라는 괴로움을 제거해 준다.

 

이와 같이 본다면, 저 포도는 시다고 말한 여유야말로 인류에게 최대의 은혜를 베푼 선행자의 대열에 낄 수 있다. 이 여우는 고전적인 행복한 한스와 함께 그에 못지 않게 고전적인 불행한 여우로서 기념비를 세워줄 만한 공적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 여우의 정체는 분명 선행의 주인공일 수는 없다. 물론 여우는 많은 점에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제거해 주었다.

그러나 전체로서 본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그 비참한 상태에 적응하게 한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크고 작은 무수한 단념에 무감각하게 해 주었다. 그와 동시에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도 자신의 것이건 남의 것이건 무신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 여우는 사람을 그 주어진 상황 속에 가두고 동경을, 또 그 동경과 함께 모든 가능성을 몰아내고 말았다. 이 여우 덕분에 인간은 본의 아니게 단념을 해 버린 어리석은 자나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299-300

 

 

 

* 행복과 의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모든 선 가운데 행복이 최상의 선이다.”

다만 그는 반드시 우리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도덕에 합당한 행동을 하는 것과 행복하다는 것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고 말함으로써 행복이라는 말을 행복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도용한 사람들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철학의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도용이었다.

무엇 대신에 무엇을이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효시가 된다. 그리고 방법론은 언제나 같았다. 그는 사회적인 의미에 있어 자기의 세계로부터 최고의 도덕적 선을 증류하여 그것을 단순히 행복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302

 

 

나는 어떤 종교 윤리학 사전에서 행복이라는 항목을 조사해 보았는데, 거기에는 이 개념은 심리학보다도 오히려 윤리학에 속한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가 그 미덕과 의무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에 도달한 생각이다. 그러나 행복은 미덕이나 의무를 대신하는 경우 언제나 약탈당하는 단어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덕은 행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그 까닭은 도덕의 그대는 무엇 무엇을 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도 행복에 귀속되어야 할 영역까지 도덕이 불법적으로 빼앗었기 때문이다.

오스카 외일드는 그 약탈자에게 정확한 말의 화살을 쏘고 있다.

내가 행복할 때는 늘 선하다. 그러나 내가 선할 때 나는 좀처럼 행복할 수 없다.” 303

 

 

 

세네카보다 약 한 세대 뒤의 사람으로 절름발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행복의 외적조건을 단호하게 정리했다. 그의 행복의 학교는 오히려 수술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했다. 거기서는 누구나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에픽테토스는 사람들을 행복으로 인도하기 위해 수술을 베풀었다. , 그는 사람들과 외계’, 즉 외적 요소를 연결하고 있는 신경을 절단한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렇게 단언했다.

아들의 죽음, 배의 침몰, 투옥 등은 외적 사실이며, 그것들이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스스로에게 끌어들였을 때뿐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신은 인간에게 영혼을 주었는가? 인간이 외면과 내면을 엄격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인간이 외면의 사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305

 

 

칸트는 스토아 학파의 방식에 따라 내면과 외면을 완전히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행복의 탐구자를 위로하지 않고 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칸트는 어떻게 행복을 구제하였는가? 어떻게 도덕과 행복을 일치시킬 수 있었는가? 307

 

 

칸트는 오랫동안 신에 대해서 몹시 냉담했다. 그는 신의 옥좌 밑에서 가차없이 모든 이성의 논증을 끌어내었다.

그러나 선과 행복의 균열을 앞에 두고, 냉혹한 이 사상가도 겁에 질렸다. 그는 자기가 그와 같이 엄격하게 떼어놓은 도덕과 행복을 다시 하나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 비록 조금이긴 하지만 신 이상으로 힘을 빌려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칸트는 이렇게 썼다.

 

행복을 마음속으로부터 바라고 또 행복에 가치를 두고 있으면서도 행복할 수 없는 사태는, 이성과 모든 힘을 갖춘 인간의 완벽한 의지로써도 절대로 극복할 수 없다.”

 

간단명료하게 비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신은 언젠가는 의무에 충실한 인간에게 보상을 해 줄 것이고 또 그때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것은 도덕에 알맞은 생활을 하라. 그렇게 하면 또한 반드시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 이 약속된 행복은 요컨대 어떻게 하면 행복에 어울리는 인간이 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도덕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말의 강조점은 분명히 행복쪽이 아니라 어울리는쪽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도, 그러니까 행복의 경멸자인 칸트에 있어서의 행복은 비록 사잇길로 빠져나가기는 했으나 다시 지고(至高)의 신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칸트의 신 없는 이상주위에서도 결국은 종교가 항상 맡아 온 역할, 즉 인간에게 행복에 대한 희망을 준다는 역할을, 행복을 무시한 보상으로서 다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종교가 도와주고 있는 경우에만 행복하지 못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정도에 따라 언젠가 우리도 행복에 참가하게 되리라는 희망이 다시 솟아오르고 있다.”

칸트는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해서 행복을 더욱 빛나게 그려 보였고 더욱 분명하게 약속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러한 그리스도교의 퇴색한 반영에 불과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311

 

 

 

* 개인의 행복은 보잘것없는 것이다

 

 

헤겔의 철학입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만일 인간이 기쁨을 목적으로 한다면 인간은 그 생각 때문에 충족을 넘어서서 보다 높은 무언가를 하려는 충동을 무효화시키고 말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보다도 더 높은 것은 무엇일까? 헤겔은 플라톤이나 토머스 아퀴나스의 계통을 잇는 사상가였다.

플라톤은 신이라는 대상에 대한 고찰에서 지복한 삶을 발견했다.”

 

행복은 전체적인 것을 고찰하는 일 속에 있다. 이것은 옛날 철학자들의 행복론으로서, 행복이란 존재하는 것을 의식하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행복이란 신이 되는 일이다. 인간에게 알려져 있는 것을 창조해 보여주는 신의 능력은 없다고 하더라도314

 

 

* 눈뜬 사자(死者)

 

 

19세기에 일어난 헤겔에 대한 반역은 거의 모두가 오직 살아 있는 개인 자신의 ’, ‘자신의 존재’, 자신의 안녕’, 자신의 행복이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데 대한 반역이었다.

낭만파나 키에르케고르로부터 니체입센톨스토이에 이르는 이 노한 사람은 비이성주의라는 이름 아래 일관된다. 316

 

 

 

19세기의 마지막 해에 입센의 마지막 희곡 우리 사자(死者)가 깨어났을 때가 발표되었다. 그 주요 모티브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떠들썩해진 말 중의 하나인 인생이었다.

조각가 루베크는,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우연성이 아니라 사실 속에살고 있다. 여기서 사실이란 그가 만든 유명하고 찬양받는 위대한 조각 작품 부활의 날을 말한다.

그런데 헤겔이 그렇게 경멸적으로 우연성이라고 부른 것, 그리고 조각가 루베크도 그의 작품 제작에 있어 보잘것없는 반주 음악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무시해온 우연성부활의 날을 제작하는 그를 위해 포즈를 취해준 젊은 모델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사실에 대해 자유로워야 하므로 그녀에 대한 자기의 정열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사실을 미치게 하는 법이다.

조각가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던 이레네는 절망 끝에 그의 곁을 떠나고, 그 이별이 원인이 되어 파멸하고 만다. 두 사람은 몇 해 뒤에 재회한다. 놓쳐버린 행복을 탄식하는 죽은 두 사람이 되어서……

이레네는 조각가를 책망한다.

당신은 바라보기 위해서내 몸과 내 영혼을 훔쳤어요. ‘처음에는 예술 작품이, 나중에는 인간이당신의 도덕이었어요.”

 

루베크는 다음과 같이 자기 자신을 고발한다.

그때는 눈이 멀었던 것이오. 그래서 나는 죽음의 소리를 결합하여 만든 것을 인생의 행복보다도 귀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318

 

 

루베크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 예술가라는 천직 자체가, 또 예술가로서의 모든 것,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이 나에게는 근본적으로 공허하며 무의미하다고 생각된다.”

그러자 누군가가 물었다.

그러면 그 대신에 당신은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가?”

내가 바라고 있었던 것은 인생이다.”

그는 이 답변을 부연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축축하고 차가운 창고에서 단속적인 소리나 돌더미를 상대로 죽음과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느니보다는 햇빛을 쬐며 아름다움에 감싸인 인생을 보내는 편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319

 

 

 

 

 

 

이 책을 다시 읽고 나서

 

 

눈은 보고, 귀는 들음으로써 더욱 예민해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행복의 수용 능력이나 행복에 대한 의지, 행복해지기 위한 재능이나 용기이런 것들도 에피쿠로스로부터 니체에 이르기까지 잊을 수 없는 행복의 찬미를 눈앞에 그려 보여줌으로써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