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겨찾기
  • 로그인
  • 회원가입
  • 홈
  • 가입인사
  • 새가족안내
  • 교회생활안내
  • 예배안내
  • 김봉길목사저서

logo

설교영상

톱 라이트 칭의론 다시읽기

박영돈 저

 

 

1장은 새 관점 학파와 라이트의 칭의론 해석의 틀이 무엇인지를 개관하고 있다.

2-3장은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책의 2/3를 할애하면서 라이트의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주해에 나타난 모순과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4장에서는 라이트의 해석의 전제인 언약적 율법주의, 연장된 유배기,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에 대한 기여와 허점이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5장에서는 라이트의 문제로 비판받는 구원의 개인적 차원의 약화, 전가교리의 부인, 이중 칭의의 위험성, 그리고 구원의 확신 문제 등을 다룬다.

6장에서 저자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칭의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뿐이며, 성화는 칭의의 열매이고,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져 가는 구원은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지향하는 목표임을 강조하며 마무리 하고 있다.

 

요약

머리말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심각하게 왜곡된 상태로 전파되어 윤리적 방종과 나태를 야기하는 값싼 은혜의 복음으로 전략해 버린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한국교회에서 칭의론에 관련해서 일어나는 모든 혼란과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그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1장 라이트의 칭의론 해석의 틀

1세기의 고유한 관점과 세계관을 가지고 택스트를 해석하지 않으면 그 공백을 다양한 전통과 교리의 틀이 메우게 된다. 바울의 칭의론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해석의 틀이 무엇인지를 논하면서 옛 관점과 새관점을 드러낸다.

옛관점- 종교개혁 혹은 루터파 신학에서 이해하는 바울신학을 옛 관점으로 상정한다.

새 관점 학파-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 제임스 던의 율법의 행위에 대한 견해, 톰 라이트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지식의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샌더스의 배경: 언약적 율법주의 / P20

샌더스는 1세기 문헌 연구를 통해 바울과 유대교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율법주의종교가 아니라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로 연속성 상에 있다고 재해석했다. 그가 말하는 언약적 신율주의란 하나님이 자신의 자비로운 계획과 은혜 안에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셔서 언약을 맺으셨고, 그 언약에 대한 인간의 합당한 반응으로 혹은 그 언약에 계속 머무르게 하기 위해 계명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샌더스에게 유대인의 율법 준수 행위는 언약 백성이 되기 위한 것’(getting in)이 아니라, 단지 언약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staying in) 수단일 뿐이다. 바울은 율법을 지킬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 때문에 율법의 행위가 무의미하다거나 저주를 불러온다고 보지 않았다. 바울이 율법의 의를 반대한 것은 행위-의 구원의 방편으로 제시하는 율법주의가 제시하는 것이 이방인을 제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느 유대인의 민족적 배타주의라는 것이다.

칭의는 언약백성의 신분에 관한 것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즉 이방인과 유대인과 함께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 들이는 언약을 하나님의 신실하게 성취하신 일에 근거한다. 칭의는 죄책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염두해 둔 것이다. 죄의 지배에서 그리스도의 지배로의 전환이 칭의다.

이런 샌더스의 입장은 그동안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인간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의 정당성을 잃게 만들기에 신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라이트의 주장은 바울의 복음의 총괄적인 주관하는 핵심주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과 맺으신 언약을 끝내 성취하고야 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남으로써 이스라엘의 오랜숙원인 유배상태에서의 획기적인 해방이 임했다는 것이다. 바울이 율법을 비판하는 이유는 유배로부터 귀환이라는 사상이다.

 

던의 배경: 율법의 행위 / p28

제임스 던은 샌더스의 입장을 적극 수용하면서, 율법의 행위에 대해 재해석했다. 전통적으로 율법의 행위는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던은 율법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구분시키는 신분표식들’(identity markers) 혹은 경계표지들’(boundary markers)로써, 대표적인 것이 할례, 안식일, 음식법 같은 것이라고 한다.

바울의 칭의론은 유대교의 잘못된 구원론을 반박하고 바로 잡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유대적 정체성으로 특정한 율법의식을 따라야 한다고 고집하는 유대인들과의 치열한 논쟁과정에서 칭의론이 탄생한 것이다.

던이 율법의 행위를 언약 회원권의 표지로 해석한 이유는 구원은 언약 회원권을 가진 유대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이방인들의 것도 된다는 보편주의 구원론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던의 이 같은 주장은 이신칭의에 근거한 개인구원론이 약화되는 문제가 노출되어 주객이 전도되고 말았다. 던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율법의 정죄에서 구원을 받느냐에 있지 않고 어떤 근거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느냐다.

율법의 요구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되는 것을 방해하는 복음의거침돌이 라는 것이다. 이러한 거침돌을 제거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시키는 사회적. 뭉화적 장벽을 허물기 위해 바울의 칭의론이 등장을 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볼 때 개인이 하나님앞에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과 평화를 발견할 것인가로 이해해온 종교개혁의 전통은 바울의 핵심 의도와 맥락을 완전히 곡해했다는 것이다.

27:26절 모든육체는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지킬수 없으므로 율법의 저주아래 있으며 이런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율법의 저주를 받으사 우리를 그 저주에서 구원하였다고 만한다. 그러나 던은 이러한 해석을 외곡된 해석으로 본다.

2:15-16절 바울의 주된 관심은 율법의 정죄아래 있는 죄인이 이떻게 저주에서 구원을 받았느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동일하게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한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샌더스와 던의 관점의 기초 위에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이라는 틀을 세워 바울의 칭의론을 해석했다. 바울의 칭의론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인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단일한 계획, 즉 언약을 끝내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라는 거대담론(meta-narrative)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이라는 거시적 틀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무리수를 두다보니 많은 문제를 노출했다.

예수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에서 그의 백성들의 처한 운명, 즉 저주를 담당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오랜 기간 계속 진행되던 유대 기간이 드디어 막을 내리고 저주가 걷힌 것이다. 이스라엘위의저주가 걷힘으로써 이제는 그 약속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디었다.

라이트의 언약적 신실성 /P52

톰 라이트는 바울의 이신칭의 구원론의 중요한 요소인 전가(imputation) 교리를 거부하고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갖는 "언약적 신실성"(covenantal faithfulness)을 주제화 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변호하고 구원하시는 행위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행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과 맺은 언약을 끝내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

9-11장은 바울이 전한 복움은 개인의 구원과 칭의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전 세계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놀라운 방식으로 성취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 즉 하나님의 의의 나타나심이다. 예수스리스도를 믿음에서 오는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고 함을 얻는 것이 바울의 복음의 핵심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바울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가 주이며 왕이시라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만물을 주관하는 권세를 가지신 주와 왕이 되셨다는 선포다. 동시에 예수그리스도 메시야 사역으로 이스라엘을 통해 만물을 회복하겨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실실성 하나님의 의가출현했다는 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다.

 

박영돈 교수는 라이트의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주해를 살피면서 라이트가 새 관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질 때마다 옛 관점을 슬그머니 끌어들였다가 다시 새 관점으로 돌아가는 모순을 보인다며 비판한다. 라이트가 바울의 이신칭의를 언약, 종말, 법정, 성령론이라는 다중적 신학 구조 안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도전을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교회론에 집중하다 보니 하나님과의 수직관계 속에서 한 개인이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구원론의 약화를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옛 관점의 전가 교리를 거부하고, 이중 칭의를 주장하는 라이트의 칭의론은 나름 성령론을 통해 비판을 피해 보려하지만 반펠라기우스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톱 라이트는 바울 칭의론의 네차원- 언약, 법정, 기독론, 종말론을 강조한다.

언약적차원- 우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언약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세계를 세롭게 하시려는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법정적차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옳다고 인정받는다. 메시야의 의로움안에서 그를 믿는 모든 언약백성이 옳다는 판결이다.

그러나 칭의는 참으로 의. 옳다고 인정받은 신분을 창조한다. 하나님은 칭의를 선언함으로써 메시아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의롭다고 인정받는 신분을 창출해 내신다는 것이다. 기독론-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선언한 기독론 바탕

종말론- 최종판결은 전 생애를 바탕으로 바지막날에 내려진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내려진 의롭다는 판결이 현재 지금우리에게 판결을 하신 것이다.

 

1장 결론

라이트는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의 실제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것은 메시아의 의로움 안에서 그를 믿는 모든 언약 백성들이 옳다는 판결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 언약 백성이 결국 옳다는 법적 판결을 내리심으로써 이스라엘을 통해 전 세계를 새롭게 하시려는 언약을 성취하신 것이다. 라이트는 이 점에서 칭의의 언약적인 면과 법정적인 면은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고 본다. 메시아의 신실한 죽음 안에서 하나님이 죄에 대한 형벌을 선고하심으로써 메시아에게 속한 사람들이 아무런 선행과 공로가 없고 경건치 않음에도 옳다는 선고를 받고 그 결과 언약 공동체의 당당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라이트의 견해는 개혁주의 칭의론에 매우 근접한 것 같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서 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벌어진다.

2장 갈라디아서 주해 갈라디아서 2:11-16 / P55

갈라디아서의 핵심 쟁점은 톱라이트의 따르면 누가 진정한 언약 백성의 구성원인가? 누가 식탁교제에 참여할수 있는가가 핵심주제다.

갈라디아서 2:15-21에서, 이신칭의는 유대 기독교인의 전통이었다. 율법의 행위는 할례와 같이 입회의식을 나타내는 율법, 음식법, 안식일법과 같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율법이 아니라, 단순히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의롭게 되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는 것 도덕적으로 옳다고 간주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2:16]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를 예수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받는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을한다. 그리스도의 믿음그리스도의 신실함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뜻할 수 있다. 바울은 칭의가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파악되는 실체이기 때문에, 칭의에 이어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은 참여적 범주를 이야기한다.고 주장을 한다.

 

갈라디아서 3:10-13/ p60갈라디아서 3:1-5에서 바울은 성령 체험이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주어졌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3:6-14에서 자신의 복음이 구약과 일치함을 입증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 15:6을 인용하면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됨을 말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14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고 우리가 성령의 약속을 받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다는 형벌 대속을 말한다. 갈라디아서 3:15-29는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을 하나님의 약속과의 연관성에서 설명한다.

10-14절 이스라엘의 실패 가운데 언약을 현저히 질식시킴으로써

15-18 약속된 단일 가족이 둘로 나뉘도록 위협함으로써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을 죄의 감옥에 가둠으로써 언약의 길을 가로 막았다.

개인이 죄를 지었는가가 아니라 국가가 율법전체를 지키는데 실패하으로 심판 유대 회복의 패턴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27-30] 그러기에 바울의 갈 3:10절의 의도는 이스라엘 전체가 율법적 언약에 충실하지 못함으로 율법적인 저주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저주는 유배상태를 종속시키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저주는 국가적인 저주가 불러온 유배사태를 종결하게 하고 언약의 축복이 이방인에게 까지 흘러가는 대로를 열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 불순종이 불러온 율법의 저주롸 그 결과로 계속되는 유배 상태를 종식시켰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호튼은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는 것이고, 신자의 내부적인 의로 칭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전가의 개념이 이미 제 2 성전기 유대교에서 조상들의 공로로 존재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라이트는 이에 반대하면서 최종적 칭의는 신자들이 살아온 전 생애에 기초하여 선언된다고 한다.

 

갈라디아서 4-5/P68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칭의론은 믿음과 율법의 행위, 성령과 육체의 큰 대립 구도 속에서 전개되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는다. -이것은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을 통해 언약을 성취해 보려는 교만한 육체의 행위다.

사라를 통하여 낳은 아들-성령을 따라 낳은자이다.

갈라디아교회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육체의 노력으로 이루어 보려는 아브라함의 불신앙의 길을 좇는 것이다.

율법을 따르는 육체의 길은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며 율법의 속박과 저주아래 놓이게 된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령의 길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에 이르게 된다.

 

결론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4-5)고 했다. 이 말씀은 로마서 8:3과 짝을 이룬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거기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4:4-5이 의미하는 바를 결합하여 함축적으로 표현하였다. 곧 우리가 육신이 연약해서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율법 아래 보내셔서 정죄함, 저주를 담당케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3:13)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라이트는 갈라디아서 4:4-5을 전혀 다루지 않고 건너뛴다. 또한 4:21-31에 기록된 사라와 하갈의 비유를 슬쩍 지나쳐 버린다.

3장 로마서 주해

로마서 1:16-17 / P81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니.’

로마서 1:16-17은 이 서신의 중심 논지의 시작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목적격이라기 보다는 주격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의이다.

로마서 1:18-32은 이방인들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음을,

로마서 2:1-3:20은 유대인도 같은 정죄를 받음을 말한다.

로마서 3:21-31은 하나님의 구원을 가장 심오하게 다루는 진술이다.

바울은 율법주의적인 것이나 민족중심적인 것을 이신칭의가 배제한다고 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한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방법이 오직 믿음, 오직 은혜임을 주장한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이스라엘을 통해 전세계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으로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해석한다.

로마서 2/ P84

2장에서 미래의 심판의 보편적 원칙을 재시한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2:10 진노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대하여 말씀한다. 2:6-16

9-11장에서 미래의 심판을 자세하게 말한다고 한다.

최후 심판의 근거는 인간의 믿음과 행함의 혼합물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의 결산이라고 말한다.

2장의 핵심은 유대인도 이방인 못지 않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2장은 유대인들이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이런 곤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묘사했다고 본다. 유대인의 유배상태는 개인의 죄가 아니라 아스라엘의 국가적인 죄이고 국가적인 실패이다.

 

로마서 3/ P98

3:21-4:25절의 라이트 주해

3:21‘하나님의 의2;17-3:8에 하나님의 단일 계획인 인간의 죄 문제를 처리하고 온 세상을 바로잡는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한다.

4장의 핵심은 하나님의 단일 계획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3:4-8절에 이스리엘은 불성실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다.

 

로마서 4/

로마서 4장을 주석하면서 나의 죄가 그리스도의 죄로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로 전가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의를 나의 의로, 나의 죄를 그의 죄로 간주(전가)하였다."(Martin Luther, "Lectures on Romans," in Luther's Works, ed., Hilton C. Oswald, (Saint Louis: Concordia, 1972), 25.) "사람이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것은 행위의 의를 배제하고,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는 것이요, 하나님의 면전에서 죄인으로서가 아닌 의로운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이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라이트는 롬 4장의 핵심은 사람이 어떠게 의롭게 되느냐? 행위냐? 믿음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아브라함의 가족인가라는 문제다.라고한다.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맏았다면 그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방인도 그 가족, 즉 언약 백성의 진정한 구성원에 포함된다는 것이 롬 4장 핵심내용이다.

 

로마서 5-8/P122

로마서 5-8장은 믿음에 기초하여 현재 선언된 칭의가 마지막 날에 선언될 판결과 어떻게 상응되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로마서 5-8장은 예수님의 주음과 부활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기반을 둔 최종 판결이라는 관점에서 본 치의에 관한 내용이다.

라이트는 최종의 칭의는 현재의 믿음과 달리 오직 믿음에만 근거하지 않는다. 최종판결은 2장에서 말했듣이 참고 선을 행하며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행하ᅟᅳᆫ 것이 실제적으로 고려되어 칭의 선언이 내려지는 것이다.

라이트는 이중적칭의 -현제적 칭의와 최종적칭의가 다르다.

현제적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 구성원이라는 인정과 선언이다.

최종적칭의- 로마서 8장에서 성령을 따라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사람이 바로 2자에서 말한 마지막 심판에서 의롭다함, 즉 최종 칭의를 받을 사람이다.

6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의의 종이 된 것이 거룩함의 열매를 맵어 영생에 이르게 한다고 역설했다.

로마서 8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가지고 사단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 세계를 구속하도록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된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속죄 제사와 중보를 통해 사단의 세력을 꺾음으로써 죄인을 대속하셨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1:4)고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다. 그러므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의 복음과 바울이 전한 칭의의 복음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로마서 9-11로마서 9-11장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막론하고 주를 부르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전세계인 열매를 맺게 됨으로써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단일 계획이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통해서 놀랍게 성취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에 충실한 삶을 사는데 실패했기에 유배라는 국가적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되었다고 본다. 9:19-29 유대인들은 새로운 출애굽이 일어나기를 고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종착점에 도달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명기에서 경고한 국가적 저주를 제거함으로써 언약 축복이 온 세계로 전달되는 하나님의 계획을 마침내 이루었다.

이신칭의는 이스라엘을 통해 전 우주를 새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틀안에 긴밀하게 엮여 있다.

 

라이트는 유대교와 바울의 믿음에 대해 자신이 확신하는 바를 성경 본문에 투사하여 바울이 확실히 명시하는 바는 무시하고 바울이 전혀 언급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유추해 낸다. 물론 구약에 맥맥이 흐르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과 언약의 맥락 속에서 바울의 복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바울서신의 모든 구절을 이 해석의 틀에 무리하게 꿰맞추려고 하면 본문을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훼손시킬 수 있다.전통적인 로마서 해석이 라이트가 지적한 대로 탈유대적 경향이 있다면 그의 해석은 범유대적 맥락으로 모든 것을 풀려고 하다가 바울의 고유한 관점과 의미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오류를 낳았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의 유대적 배경과 맥락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이방 전도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재조명하고 재구성했다고 봐야 한다.로마서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보낸 서신인데 그 모든 내용이 유대교의 믿음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맥락에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4장 주석적 문제 해석의 전제 /

성경에 충실한 것 같은 그의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는 성경적 틀은 1세기 유대교에 대한 독특한 견해와 아브라함을 통한 전 세계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단일 계획의 큰 그림으로 엮여 있다.

라이트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 이스라엘을 통해 전 세계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단일 계획이라는 일관된 맥락 속에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전체의 내용을 해석하려고 했다.

그결과 믿음오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본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구원원이라고 선언된다는 의미로 둔갑하고 말았다.

칭의논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제거되고 줄이 연합하여 아브라함의 가족을 구성한다는 교회론적 차원으로 나아간다. 칭의는 개인의 구원 신분의 변화라는 좁은 범위인 고립된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화 교회와 종말 성령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교리다.

바울의 칭의론은 개인구원의 차원을 넘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 몸인 교회와의 연합,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의 통합이라는 선교적이고 종말론적 차원까지 맞닿아 있다.

라이트가 성경 자체의 증언보다 고대 문헌에 대한 어떤 해석에 더 의존하여 1세기 유대인들은 이런 믿음과 사고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그토록 충실히 따른다고 고백하는 오직 성경의 원리(Sola Scriptura)를 거스른다. 고대 문헌을 해독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학자들만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 풀며, 복음의 핵심적 진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일반 신자도 해독할 수 있도록 명료하게 계시되었다는 종교개혁의 확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언약적 율법주의 /

라이트는 1세기 유대교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이며 바울이 비판한 율법의 행위는 할례와 같이 유대적인 경계 표지 역할을 하는 의식이고, 바울이 율법의 저주를 이스라엘의 유배로 보았다고 전제하지 않는 한 바울의 칭의론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율법의 행위 / P154

율법의 행위를 할례나 음식법가 같이 언약의 배겅의 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믿음과 율버의 행위, 성령과 육체 대립 구도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할례를 받는 것은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동시에 부여 받는 것이며 만약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면 할례는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였다. 2: 25-9

 

연장된 유배기? / P158

이미와 아직의 구도속에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배방되었지만 종말에 궁극적으로 실현될 죄와 사탄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대망하였다.

유대인들이 다수가 기대한 메시아의 구원은 죄와 사탄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보다는 민족적해방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의는 언약적 신실성? 라이트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나타내듯이 바울의 의도 같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는 창조주와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세상을 공의롭고 자비롭게 다스리는 데서 나타나는 의로움이다. 구약에 하나님의 의는 당신의 개성을 비참한 곤궁에서 구원하심을 통해서 밝히 드러난다.

인간의 불의로 세상은 하나님이 원래 지으신 온전한 상태를 잃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 죄를 해결하심으로써 이세상을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된상채, 살롬의 상태로 회복하는 의이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에 구원과 살롬을 안겨주는 하나님의 행위라고정의 할수 있다.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그의 자비와 거룩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의로움이다.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에게 의로운 신분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공의롭고 자비로운 행위를 뜻한다.

5장 신학적 문제 구원의 개인적 차원 / P171

3:13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율법의 저주가 되셨다고 한 말씀을 그리스도강 nfl 개개인이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임한 국가적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로마서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일차적으로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서의 구원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유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전가 교리 /

라이트가 이해하는 바울의 칭의관에서 비판받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그가 전통적인 전가’(imputation)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전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움이 죄인에게 전가되어 재판장이 죄인을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지 않고 의인으로 여기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에 의한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죄인에게 전가되어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트는 전가라는 용어 사용을 거부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법정에서 의인이라 선언하시는 것으로 본다. 그의 관심은 개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어 구원받을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언약 백성의 구성원이며 그가 언약 백성인지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다. 라이트에게 칭의는 전가에 의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참여된 의’(incorporated righteousness)이다.

라이트가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한 개인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사건인 칭의가 먼저 경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칭의의 법정적 측면이 참여적 측면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 물론 동시적으로 사건이지만, 먼저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하고, 이어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며, 의롭게 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구원의 서정에서 각 단계가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논리의 문제인 것과 같다. 라이트의 전통적 칭의 교리에 대한 도전은 법정적 칭의와 참여적 칭의 개념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그가 의의 전가 개념을 의도적으로 축소시켰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중 칭의 /

라이트가 비판받는 두 번째는 이중 칭의의 문제다. 라이트에 따르면 의롭다는 선언은 기독론적 바탕 위에서 종말론적으로 판결이 선취되는 것이다. 그는 현재적 칭의의 방편은 믿음이고, 최종 칭의의 판결은 우리의 전 생애의 행위에 근거하여 마지막 날에 내려질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님이라는 구도로 설명한다. 그러나 믿음에 근거한현재 칭의와 전체 삶에 근거한최종 칭의라는 주장은 반펠라기우스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는 이런 비판을 의식하고 성령의 역사가 최종 칭의를 보증한다고 말하지만 궁색할 뿐이다. 이유는 칭의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신실함과 거룩함에 근거하여 심판대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인간의 선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칭의의 열매요 증거이다. 라이트의 최종 칭의 방식은 하나님 주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한다.

세 번째는 새 관점의 칭의론이 2천년 기독교사의 정통 칭의론을 능가하는 혁명 같은 사상인가라는 점이다. 그동안 옛 관점이 개인구원론 중심의 안일함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구약과 신약을 언약, 교회, 구원, 성령, 종말 등을 체계적으로 엮어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1세기의 유대교 맥락에서 신선하게 재구성한 새 관점은 상당히 매력적이고 도전적이다. 그럼에도 기독교 2천년의 전통을 전복시키는 행위는 매우 위험한 처사다. 신조나 신앙고백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성경에 기초하여 숙성시킨 신앙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 자체의 증언보다 1세기의 랍비 문헌들에 경도되어 유대교를 언약적 신율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큰 오류라 하겠다. 라이트의 경우도 모든 것을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라는 틀로 적용하다보니 개인 구원론의 약화, 칭의의 법정적 측면의 재구성, 최종 칭의의 반펠라기우스적 비판을 야기했다.

 

구원의 확신

 

결론

라이트는 종교개혁의 전가 교리가 의의 주입을 주장한 중세의 오류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마치 한 사람의 의의 실체가 다른 이의 것으로 주어진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전가 교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결코 실체적·본질적으로 우리 것이 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근거로 그 의가 우리의 것으로 인정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짊어지심으로 그가 실제 죄인이 되시지 않은 것같이 그리스도의 의가 주관적으로 우리의 도덕적 특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가 교리가 법적 허구라는 라이트의 비난과는 정반대로 칭의가 법적 허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전가 개념은 필수불가결하다고 전통적으로 믿어 온 것이다. 칭의의 법적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 속죄로 인한 의로움이라는 실체에 확고하게 근거한 것이기에 결코 법적 허구가 될 수 없다.

 

6장 바울의 칭의론

구약의 배경: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 나라 / 인간의 불의와 하나님의 의 출현 /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기초한 칭의 / 칭의의 열매: 성화와 영화 / 칭의와 최후의 심판 /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야 할 구원 / 칭의와 하나님 나라

 

성경이 증거하는 바울의 칭의론은 무엇인가? 박영돈 교수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언약적 신실성이라는 개념으로 축소시킬 수 없고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 의는 어떤 조건이나 차별 없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근거하고 부활로 완성한 의다. 바울도 칭의를 이중적으로 이해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화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전 과정에 걸쳐 펼쳐지는 칭의의 당연한 귀결이자 산물이다. 따라서 신자의 거룩한 삶과 행실은 최종 칭의의 근거나 공로가 아니라 이미 내려진 칭의의 믿음이 참되다는 증거인 것이다. 바울이 전한 칭의의 복음은 개인 구원에만 국한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상을 당신과 회복시키고 죄로 오염된 온 우주를 갱신하여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포괄하는 것이다.

신자의 거룩한 삶과 행실은 최종 칭의의 근거나 공로가 아니라 이미 내려진 칭의의 믿음이 참되다는 증거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역할을 한다(Our works does not justify us but justify our faith).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우리 밖의 의로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만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밖의 의로움만 의존하는 믿음은 반드시 우리 안에 의로움을 산출한다.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붙잡을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고 행하시기 때문이다. 칭의가 참되다면 지체 없이 성화가 따라온다. 칭의는 성화에 근거하지 않지만 성화 없이 칭의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으며 항상 함께 나타난다. 따라서 성화 없이 칭의로만 구원받지 못한다. 거룩함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할 거라고 했다. 성화는 칭의의 공로적 조건이나 근거가 아니지만 칭의의 필연적 열매다. 성화가 칭의를 확립하지는 못하지만 칭의가 참되다는 것을 입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