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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라이트 칭의를 말한다. 요약

2019.09.21 10:01

admin 조회 수:17

톱라이트 칭의를 말한다.

최현만 옮김

 

칭의란? 어떤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킨다.’

파이퍼는 예수그리스도의 의[예수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죄인에게 전가되는 것을 칭의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네가지 주제가 한데 모인 것이다.

1]이스라엘의 메시야인 예수의 사역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칭의와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이갸기 내용이다.

2]언약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며 그 언약의 목적은 전 세계의 열방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3]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 그 초점이 있다. 하나님은 재판관으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 받았다고 벌을 면제 하여 준다.

4]종말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현제의 칭의는 최종적인 칭의를 미리 앞 당겨 맛보는 지금의 순간이닫.

 

1장 칭의는 무엇에 관한 내용이며 왜 중요한가?

 

로마서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칭의 교리에서 핵심적인 요소들은

1]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그와 맺으신 언약-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하신 약속에 대한 바울의 이해이다.

2]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그리스도 안에 있음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간되는 것이다. ,

3]부활과 새창조-

 

4]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는 것-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속 아에서 그 구속을 통해서 성령에 의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구원 받았다는 것이다. [1:12-14]이제 한 가족안에서 하나를 이룬다. [2:11-12]

5]역사를 통하여 지속된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종말론- 장차 올 시대,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실리실 것이라는 것이다.

6]성령과 기도교적인 인격성-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는 것은 특정한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사람을 통하여 지혜롭고 선하며 풍족하고 풍성한 하나님의 질서를 세상에 심겠다는 표를 갖고 계셨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실패하였다.

 

15장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 이스라엘가 언약을 맺는다.

하나님께서는 아르라함과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와 인류를 구원하시려 했떤 단일한 계획이 있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소명에서 알 수가 있다. 이스라엘의 대표자 참 이스라엘 메시야 안에서 열매를 못는 모습을 바울이 확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메시야 예수의 죽음가 부할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세계의 역사안으로 대격변을 이르켜서 칩입해 들어오신다고 바울은 말한다.

 

2장 교전수칙

갈라디아서 로마서는 칭의론을 중심이다.

골로세서와 에베소서는 우주 구원론이다.

1:10 “하나님의 계획은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지 구속 안에서, 그 구속을 통해서 ,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축하였다. [1:11-14]

그결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하여 이루어진 교회가 세워지고, 이들은 모두 믿음을 통한 은혜로 동일하게 구출되고[2:1-10]

이데 하나의 가족안에서 하나를 이루며[ 2:11-22]

셰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될 것이다. [1:15-23]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의 증쵸가 될 것이다. [3:10]

 

 

3장 언약과 율법과 법정

가나안 땅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에서 선지자들의 생각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시 한번 행동 하실 것인데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에게 하셨던 약속이 마침내 실현 될 것이며 궁극적인 성취가 이루어 진다.

다니엘은 유배기간이 얼마나 오래 될 것인가?얼마나 오래 지속 될것인가? 예언자들의 문서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에스라도 스가랴도 예래미야도 연구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역속을 가나안 땅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에서 재해석하는 사람은 다니엘 뿐이였다.

 

70년 칠십주에 해당한 했습니다 7&70=490이다.

 

바울신학과 연관된 시대의 상황 세가지

1] 바울시대에 1세기의 많은 유대인들은역사의 시초로부터 고대 예언자들의 시대를 거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구원의 절정의 순간을 향해 뻗어가는 역속되는 내러티브 안에서 그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었다.

2]이때 당시 사람들은 다니엘 9장에 기초하여 이 연속되는 내러티브가 지속되는 유배 상태를 가로 지르는 긴 통로로 간주 되었다는 것이다.

9;36,에스라 9;7-9 “우라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날 종이 도었으니 곧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때부터 이 날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여,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겨 졌고 근감힌 수치를 당하게 하신 것이 노늘날과 같습니닫. ‘누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지만 우리하나님은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셧습니다.

 

9장 다니엘의 기도

당신은 의롭고, 우리는 그르다. 우리는 잘못되었다. 소송의 관점에서 언약의 관점에서도 하나님은 의롭고 우리는 그릇다. 우리는 잘못되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신판으로 유배를 보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속성 때문이다.

다니엘은 당신의 모든 의를 따르 당신의 의로운 행위들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함으로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 파이퍼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실실함으로 언약적인 의 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의인 언약적인 신실함이란?

체다카 엘로힘= 그리스어로 말하면 디카이오 수네 때우는 하나님이 세운언약에 대한 충실함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함에 신실하게 행동을 하신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명예와 하나님의 명성이 환장이 되고 창양을 받는다.

하나님의 의는 디카이오 슈네는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 피조 세계를 구출하기 위한 신실한 헌심을 말한다.

 

존 파이퍼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라고 하였다.

로마서 4장에서 창세기 15장을 반복하여 인용하는데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는데 아브라함과 언약의 체결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창세기 15장에서의 언약에서 하나님의 의와 아브라함의 의는 다르다.

아브라함의 의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서 올바르게 행동을 하겟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온 세계를 유업으로 받게 될 약속에 충살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온 세계를 유업으로 받을 때 까지 충실함을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언약을 지키든 안지키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유업을 얻을 때 까지 충실하게 행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은 스스로가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통하여 온 세계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충실한 것이다.[3;1-8]

바울은 바울 서신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줄임말로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하나님은 이들이 언약을 파기하였어도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신실하게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의 결정이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의 부활이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야 예수님 신실한 순종의 죽음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녀들의 죄의 문제를 처리 하신다. 3:24-26]

이렇게 죄의 문제를 처리하시는 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인 전 세계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가족을 창조하기 위하여서이다.

 

유다가 다말에게 너가 나보다 의롭다고 하였다. 그녀가 나보다 도덕적으로 의롭다는 뜻이 아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너가 나보다 의롭다는 것은 다윗이 승소하였고 나는 패소하였다는 법정적인 의미이다. 하나님의 너의 손을 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손을 들어 주엇다는 것이 칭의다. 도덕적으로 의롭다는 뜻이 아니다. 법적으로 의롭다는 것이다. 법이 너의 손을 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율법과 칭의

3:22-29, 3:7-1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브라함의 언약적인 관계에서 애굽에서 구출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인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이다. 하나님은 구출후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었다. ‘율법은 언약의 헌장으로서 다른 나라들과 구분하였다. “이아 같이 윫법을 지닌 나라가 어디 있느냐?

율법이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순종은 하나님이 은혜에 대한반응이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을 위하여 율법을 주었을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그 언약에 의해 주어진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였다.

유대교의 구원의 핵심문재는 개인의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온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것이었다.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 누가 구원의 수해자가 될 것인가?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인가?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이스라엘이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다. 지금은 교회이다.

 

4장 칭의 여러 정의들과 난제들

칭의 개념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 여러 가지의 설명중 하나이다. 법적적인 설명인”, 언약적인 설명인 언약”, 종말론적인 설명인 미래의 재판의 판결이 현제에 성취되고 이루어 졌다의 설명에 대한 이해이다.

위의 세가지의 의미 법정적, 언약적, 종말론적, 칭의에 대하여 바울신학에서 주요 3단락을 연구하면 된다

3:21-425, 9301013, 갈라디아서 2:15-411절이다,.

 

법정적, 언약적, 종말론적, 칭의는 무엇에 대한 것인가?

맥그레스는 인류를 자신과 화해시키려는 하나님의 행위 전체를 말한다 고하였다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로부터 죄인들 위해 죽으시고 부활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 복음전파, 성령의 사역, 사람의 마음에 복음을 통하여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 성령을 통하여 기독교인의 인격과 행동의 발달, 궁극적인 구원의 확신, 마지막 신판을 안전하게 통과하여 그 종착점에 이르기 까지 그 모든 의미를 포함해야 이것이 칭의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여태 우리는 법정적인 칭의를 이해해 왔다. 칭의는 그 법정이 누군가의 손을 들어 주었을 때 그가 지니게 되는 상태를 지시한다.

칭의는 어떤 사람을 변화시키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상태를 부여하는 선언을 가리킨다.

칭의는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가 옳았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울의 관점은 창조자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족을 통하여 이 세계를 곤경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것이다.

죄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와 죄용서와 칭의와 영화를 주는 것, 이모든 것이 창조로부터 시작되어 이제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단일한 언약의 목적이다.

 

로마서 411절에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의 징표를 받는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창세기 17:11절 원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할례가 그 둘 사이의 언약의 징표가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였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3장은 바울이 언약이라고 말을 한다.

바울이 언약체결을 인용하면서 언약이라는 단어를 라는 단어로 대치하였다.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언약체결의 단어를 언약이라고 갈라디아서 3장은 바울이 말을 한다.

그러나 로마서 4장은 같은 내용을 라는 단어로 이야기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로마서 4장 전체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풀어 설명을 한다.

로마서4장의 틀은 창세기 15장의 내용이다.

창세기 15장의 언약의 내용

1]아브라함의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히 많은 수로 번성할 것이며,

2]그의 후손들이 외국 땅에서 유배를 당하겠지만 결국 돌아 올 것이며

3]그들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상속을 받게 될 것이다.

바울은 창세기 15장의 내용을 로마서 4장에서 재 멋대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15장은 12, 15, 1722장과 나란히 배치 되어 있다.

이 내장은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오 세계가 저주가 임했다. 사람의 불신앙과 자만심과 반역은 바발탑으로 이어 졌다. 인간이 이러한 반역을 저지른 동안에 세상에 축복을 주시기 위한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주었다. 이것이 창세기 15장의 언약의 핵심이다.

 

창세기 15장의 언약의 내용을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언약으로 바울이 말을 한다.

창세기 15장의 언약의 내용을 로마서 4장은 같은 내용을 라는 단어로 이야기 한다.

창세기 15장의 언약의 역사를 갈라디아 3장에서는 언약적인 틀에서는 언약으로 봤고, 창세기 15장의 언약의 역사의 내용을 로마서 4장은 법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라고 봤다.

 

그래서 바울은 칭의 교리를 언약적 차원과 법정적인 차원으로 이해를 하였다.

그러나 언약적 차원과 법정적인 차원의 칭의 교리로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종말론적 이해가 필요하다.

언약적 차원과 법정적인 차원의 칭의 이해는 종말론적인 차원의 칭의 이해 없이 이해 될 수가 없다.

종말론은 새로운 시대가 계시 되었다는 선언이다. 종말론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약속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과 전 창조세계의 구출이라는 목표를 염두 해둔 언약이다.

이 언약은 메시야 예수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개시 되었다. 이 계시된 복음을 믿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 즉 예수안에 있는 자들은 옛 시대 안에서와 새 시대 안에서 믿음안에서 살게 되었다.

 

누군가 예수가 주시라고고백을 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살리셨다고 믿는 그때[10:9] 믿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미래의 재판의 판결이 현제에 어떻게 성취되고 이루어졌는지 이해하기위하여 구원의 내용을 언약이라고 바울은 롬4장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법정적인 의미로서 예수가 옮았음이 인정된다. 따라서 예수님안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옳았음을 인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교리를 이해하는 데는 언약적, 법정적, 종말론적인 이해가 중요하다.

 

2 부 부해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고리도 전후서 에베소서 로마서

 

갈라디아서서 말하는 칭의 의미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서 말하는 칭의을 알기위하여 갈라디아서의 전후 문맥의 위치와 전후의 문맥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지가 중요하다.

 

먼저 갈라디아서 18-9절에서 배경을 알아 보자

갈라디아서의 배경을 보면 메시야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 과거에 이교도였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제 급히 유대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기를 갈망하였다. 그래서 갈라디어서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기 위하여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디도가 하례를 받은 것은 자의로 받은 것이지 강요하여 받은 것이 아니다. [2:3]

베드로는 교도였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기를 원한다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

율법의행위로는 유들은 이방인들과 식탁의 교제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서론에서 갈1:3-5절에서 현제 악한 시대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내 주셨으니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를 원한다. ”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성취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이 된다. 로 시작이 된다.

 

갈라다아서 2: 16절의 칭의는 유대인이 기독교인과 이방인의 기독교인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옳은가? 그들이 한 식탁에 속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바울은 이신칭의를 언급한다.

이신칭의에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의 변화, 한 가족에서 다른 가족으로인도,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창조된 새로운 신분에 대하여 바울은 이신칭의를 언급한다.

 

의롭게 되는 것은 너희 죄가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를 받는 것,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것은 하나님앞에 예수님을 통하여 옳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다아서 2: 16절의 칭의는 하나님이 이교도 이방인들을 이신칭의로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간주하였다는 것, 그러므로 함께 식탁교제를 누릴 권리를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예수님의 신실하심으로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갈라다아서 2: 16절의 칭의를 알아 보기전에 전후 문맥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2:11-14절의 문맥의 위치

11게바가 안이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 온 어떤 이들이 이르 전에 게자가 아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레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 가매

13남은 유대 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그르므로 내가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으로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 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 답게 살라하느냐 하였노라.”

 

베드로가 이교도였던 기독교인들에게 너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싶다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베드로가 말한 유대인으로 살라 라는 의미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의 준수와 유대절기와 유대적인 식사를 준수하아여 한다는 말인가?

갈라디아에서 바울이 이신칭의의 출발을 유대인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옳은가? 이들이 한 식탁에 속한 것인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옳은 가?

안디옥의 선교에서 바울이 처음으로 이신칭의를 이방인의 사도로서 베드로가 말한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싶다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에 대한 반론으로 이신칭의를 언급하였다.

 

2: 15-16절에서 바울의 반론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옳다는 지위가 주어진 다는 것이다.

바울의 반론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가로 죄에 대하여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를 받는 다는 것,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 하나님앞에 옳다고 간주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이 가족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것, 따라서 식탁 교제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방인들을 의롭다고 하여 가족의 구성원으로 간주하였다면 따라서 식탁의 교제를 함게 누릴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2: 19-20

메시야의 신실함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예수님의 신실함이다. 메시야의 신실한 죽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재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메세야로서 믿게 됨으로서 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재정인 개인의 믿음이 이제 메시야에게 속하게 된다. 메시야로 재정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자들이 표시가 된다.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사람들이 의롭게 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메시야의 신실함으로 통하여 의롭게 재정의 하였기 때문이다.

 

메시야의 신실한 죽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재정한다. [ 2;19-20]

율법의 행위로 우리가 의롭게 될 수가 없는 것은 두 가지다.

1] 하나님이 메시야의 신실함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는 것

2]율법이 하는 역할을 죄를 드러내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서 나는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내가 율법을 통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메시야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였지만 나는 살았다. 하지만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메시야이다. 이제 내가 육체 안에 사는 것은 그 생명으로 살아가되 나를 사랑하여서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실함안에서 사는 것이다. ”2:20

이말의 주해는 고후 4:7-18절에서 있다. ‘메시야의 부활은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였다. 그안에서 발견된 사람들은 이미 그를 알고 있으며 그들안에서 작용하는 그의 죽음과부활을 발견한다.

 

메시야의 신실함으로 통하여 옛시대로부터 건져내어 새로운 시대로 데리고 갔다. 메시야를 믿고 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백성을 재구성하였다.

이제 그들을 토라의 지배 아래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한 세계로 데려간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도덕적인 특성을 가지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정한 가족에 속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칭의는 하나님의 백성에 진정으로 속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자신의 판결을 가리키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3: 1-411절의 해석

하나님의 자손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누구인가?

먼저 갈라디아서 3:6-7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 믿음을 기반으로 둔 사람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위대한 성취는 출애굽을 바라고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4장의 내용이다.]

아브라함의 자녀들은 오랫동안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그 종살리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해방하는 수단은 신실한 이스라엘의 사역이다. 즉 그들의 대표자 메시야 죽음이 될 것이다. 그들은 세례라는 죽음과 부활의 순간에 홍해의 물을 통과하는 것과 같이 그 순간을 통해서 메시야인 그에게 결합 될 것이다.

너희가 모두 메시야 예수 신실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메시야에게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이 누구나 메시야로 옷 입게 되기 때문이다. ”

갈라디아서 3:4네가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육체로 마치려고 하느냐.”

다른 말로 말하면 오직 믿음으로 시작을 했는데 오직 행위믿음과 해위가 혼합되어서 협력주의일부 혼합된 것으로 마치려고 결심하느냐?

 

갈라디아서 3:8-9 “성경은 하나님이 믿음으로 이방인을 의롭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 그것을 먼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였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은 신실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

갈라디아서 3:14절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였다.

갈라디아서 3:15-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를 부르시고 , 그에게 약속하심으로써 세계를 축복하기 위하여 위해한 계획을 시작하였다.

갈라디아서 3:18절 그 유산은 약속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셨다.

갈라디아서 3:22절 이약속은 이제 믿는 자게에 속한다.

3:29절에 너희가 메시야에 속한사람이라면 아브라함의 씨이며 약속을 따라 유법을 상속받을 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은 도대체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인가?

메시야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저주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에 답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죄에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케 하기 위해서이다. ” 다른 말로 말하면 죄를 해결하려는 목적이다.


217-20절에서는 율법이 아브라함의 약속이 이방 나라들에게 퍼지는 것을 방해하고 따라서 전 세계를 위한 이스라엘을 통항 단일 계획이 진행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방들에게 미치게 하려고 믿음을 통해 성령의 약속을 받게 위해서이다. 이것이 메시야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저주가 되었다고 이렇게 말을 한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 부르심에 신실하지 못함에 대한 판명을 받는다. 메사야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참 이스라엘로서 성령이 거주하는 단일한 하나님의 가족 교회를 탕생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은 것이다.

 

그래서 빌립보서 3;3절에서 믿는 우리를 표현하기를 성령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메시야 예수안에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

이스라엘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전 세계의 창조주가 되시고 재판관이라는 사실을 이방세계에 강력하게 보여주시는 표시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말한다.

 

7

로마서

 

우리는 로마서에서 그러므로 예수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정죄함이 없다. ”고 선언한다.

그런데 이 칭의론과 칭의론 사이 사이에 하나님의 마지막의 심판이 기록되고 있다.

왜 기록되어 있을까?

 

2:1-16절은 하나님의 마지막의 심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로마서 21-16절에서 하나님의 미래의 심판에 대항 첫 번째의 원칙을 설명을 하고 있다.

 

제판장은 예수님이 될 것이다.

11절에 유대인과 헬라인이 동일하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이면서 정의로운 심판자로서 마침네 세상을 바로 잡으실 것이다.

우리가하는 일 행위 율법의 행위, 또한 내가 하는 일에 생각에 대하여 내가 하나님께 변증을 하여야 한다.

 

14:10-12너희가 어찌하여 형제를 심판하느냐? 혹은 어찌하여 너희 현제를 경멸하느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아. 주께서 내가 살아 있으니 만물이 나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며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께 설명을 해야한다. ”

 

고린도 후서 5:10우리는 모두 반드시 메시야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어 각자가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일에 다라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서 5:19-21육체의 일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배제 된다. ”

갈라디아서 6:8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는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자는 영생을 거둔다.

 

81, 13“ ”만일 너희가 육신에 따라 살면 죽을 것이지만 만일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너희가 살 것이다. “

 

그런데 이러한 미래의 심판의 판결이 롬 3:21-31절에 믿음에 기초하여 내려지는 현제의 심판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예수안에서 받은 십자가로서의 심판인 현제의 심판이 미래에도 일치한다. 현제의 심판이 미래에 심판이 된다.

 

우리는 왜 이렇게 현제의 판결이 미래의 판결과 일치를 하는가?

바울은 여기에 대한 답으로 성령과의 관계로서 설명을 한다.

로마서 82-27절에 성령의 사역에 대한 긴 담화로서 이야기 한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으로 예수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메시야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8: 9절에서 만약 너희에게 성령이 없다면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만약에 성령이 없다면 칭의로 아무것도 아니다.

칭의를 가져온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이 도대체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인가?

칭의를 가져온 메시야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저주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에 답은 우리를 죄에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케 하기 위해서이다. ” 다른 말로 말하면 죄를 해결하려는 목적이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방들에게 미치게 하려고 믿음을 통해 성령의 약속을 받게 위해서이다. 이것이 메시야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저주가 되었다고 이렇게 말을 한다. 메사야인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참 이스라엘로서 성령이 거주하는 단일한 하나님의 가족 교회 성령의 공동체를 탄생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은 것이다.

 

칭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과 성령에 대한 가르침과 미래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을 이 세가지의 것을 나란히 두고 보면 다 일치한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나고 진정으로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성령이 우리들안에 역사할 때이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게 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성령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면서 부터이다.

 

율법

유대인은 진정으로 율법을 의지하였고 진정으로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세상과 구분하는 행동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소경에게 인도자가 되는 역할을 맡았다.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빛이 되는 역할을 맡을 숙 있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을 교정하고 이리석은 사람을 교정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이 유대인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 계획을 수행하는데 실패를 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명을 이행하는데 실패를 하였다.

 

무엇이 문제 인가? 율법이 문제인가? 아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문제 인 것이다. “너희로 인하여 열방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도다.” 이스라엘도 아담 안에 있었다.

아담안에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세상의 구속을 가져다주기로 약속을 하였지만 이들이 죄로인하여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열방에게 여호와 이름이 모욕을 당하므로 이제는 이들도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로마서 3:1-8절은 이스라엘의 유죄 때문에 이러한 축복을 열방에게 가져다 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스라엘에게 한 약속이 신실하게 이행이 될 수가 있는가?

아브라함의 언약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제 참이스라엘 예수님 안에서 실행되고 나타난다. 이것이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롬 3:21-425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부각된다.

 

이사야 52장은 이스라엘이 열방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증언하면서 이제는 열방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참이스라엘 메시야의 약속, 종의 약속으로 이어진다.

에스겔36장은 성령으로 마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새 일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이 된다.

이러한 메시야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으로 이스라엘이 그의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이스라엘이 열방을 구원하는 복음사업을 할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로마서 2:25-29절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메시야의 구속과 성령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그들이 계명을 지키게 된다.

 

이것이 새로운 교회론에 대한 전망이다.

교회란? 열방을 구원하는 사역, 선교지양적인 백성, 종이 사역과 성령의 사역으로 변화된 하나니의 백성, 이제 메시야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빛과 진리를 간직하고 열방을 향하여 나아가는 백성을 교회라고 한다.

 

새로운 교회론은 에스겔서 36장의 신학이다.

그리고 다니엘 9장의 내용이다.

이스라엘이 490년간 이방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세상의 종이 되고, 죄의 종이 되어서 메시야와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새롭게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갱신한다. 그리고 열방을 향한 비젼을 받는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이 되게 하려고 위탁된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위탁했다. “위탁했다는 뜻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거나 전달 되도록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믿고 맡겼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편지를 위탁을 받았다는 것은 나를 위한 편지가 아니라 그 편지를 전달 받을 사람을 위하여 위탁한 것이다.

이러한 위탁의 사명인 하나님의 위임에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지다. 열방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편지들이다. “예수천당이러한 노방전도로만 이 선교위임을 감당하는 것이 편지의 내용일까?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이 등장은 한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서 3장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갈라디아서 3방의 내용은 사람들은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게 되었고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이 사망에서 구출하고 죄와 사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로마서 4장의 핵심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과 함께 시작을 하다.

로마서 3:4절에서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신실하게 그 약속을 행하실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로마서 5-6장의 내용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족을 노예의 상태에서 구출하고 그들의 유산을 상속 받게 될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약을 맺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통하여 어떻게 일 하실 것인가?

하나님의 언약의 계획과 이스라엘의 충성 이스라엘의 신실함이 필요하였다. 충성된 이스라엘은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를 한다.

신실한 이스라엘을 띤 메시야가 필요하였다. 메시야의 신실함으로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과 상속이 이루어 진다.

하나님의 의는 한편으로는 메시야 예수의 신실함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그 배일이 벗겨 진 것이다.

메시야의 신실함이 무엇인가? 죽음에 이르기 까지 복종한 메시야의 죽 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죄를 처리하는 죽음이며, 죄인을 의롭게 하는 죽음, 죄인이 옳은 것으로 선언된 죽음이고, 죄의 구속의 죽음이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이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분이다. [3:26]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다실 살려 부활함으로서 그를 옳다고 인정함으로서 예수님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스라엘 메시야의 대표적인 죽음이다,.

 

칭의는 실제로 어떤 작용을 하는가?

 

왜 미래의 심판이 현재 심판으로 대치되는가?

 

마지막 날의 심판이 현재 의롭다는 현재 심판으로 대치 되는 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롣바고 판결을 받은 칭의는 마지막 날에 선언될 판결을 지금 현제 예기하는 현재의 판결이다.

현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옳다고 하였다. 현재 옳다는 이 판결이 마지막 날에도 옳다고 미래의 재판장에서 울러 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에 선언될 판결은 지금 예기하는 현제의 판결의 어떻게 가능 하는가?

 

이것은 기독론에 기초를 하고 있다.

미래의 판결을 현재로 가져오는 일이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반은 심판주인 메시야를 현재로 가져오는 일이다. 현재의 메시야의 부활이다.

미래의 메시야를 현재로 가져오는 일은 메시야의 현재의 부활이다. 현재는 부활이라는 선례도 없고 현재로는 상상할 수 없는 미래의 사건이 현재에 미리 일어나는 사건이다.

미래의 메시야의 부활은 현재 역사 한가운데 일어난 사건이 되었다.

 

하나님은 메시야의 부활과 승천으로 이 부활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의 왕국을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메시야의 부활을 통해서 모든 창조 세계에 대한 그의 주권적이고 사망가운데 있는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는 통치를 시작하였다.

 

메시야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메시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상숭배, , 사망이라는 전체적인 문제 상활을 처리하셨고, 그 결과 메시야의 부활안에서 새 창조를 시작하였다. 메시야를 통한 새 창조야 말로 시간과 공간, 일류 문화 한 가운데에 위치한 가장 위대한 새로운 실재이다.

메시야의 부활은 이세상의 죽음과 세상의 왕 노릇하는 죽음의 원인인 사망의 권세가 이 부활의 시점에서 이미 패배를 당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망의 권세가 패배를 당한 부활에 기초한 기독론이 바울이 말하는 법정적인 미래의 판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약적인 선언, 미래에 의롭다고 인정하는 미래의 판결이 현재판결로 가져오는 기초이다.

 

예수님을 사망가운데 살리셨을 때, 즉 예수님의 사망이 우리와 연합이 되는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은 이미 역사안에서 미래의 판결을 이야기 하였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땅에 사시면서 미래의 신판에 대항 이야기를 현재에 예수님 안에서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니 ,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이 사람은 그 신실한 메시야 이니, 이스라엘에게 두었던 나의 목적과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소명이 이제 예수 십자가의 세례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메시야 예수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내 아들이다. 이제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한다.”

 

 

 

 

믿음을 어떻게 불러 일으켜 지는가?

 

복음을 잘 들음으로 서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다. 복음 선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순전한 은혜의 행위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은혜의 행위가 복음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 시대 그리고 앞으로 올 시대 모든 사람들 가운데 믿음을 일으키는 수단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역사하여서 구원하는 능력을 행하신다.

아무도 성령을 통해서가 아니고서는 예수가 주이시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

성령은 복음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만 역사한다.

복음이 설교자를 통해서 선포될 때에 성령은 구원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메시야의 말씀에서 온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데서 온다. 하나님의 아들의 관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기독론이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멧세지가 법정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심판주로서 판결을 가져 오고, 현제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이 마지막날에 심판이 현제 믿음는 사람에게 의롭다는 판결로 대치되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2,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아코에 피스데오스 이다.

아코에라는 단어는 듣는 행위, 듣는 능력을 의미한다. 들을 귀를 말한다.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멧세지이다. 이 복음의 말씀이 성령의 강력한 능력으로 불어서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로 사람들에게 들려 저서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켜, 예수가 주이시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메시지가 믿어지게 된다. 메시지를 믿게 되는 순간 믿음이 온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표이다.

 

하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 셨을 때 귀청이 터져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한다. ” 다른 말로 말하면 이는 그 신실한 에시야 이니, 이스라엘을 통하여 열방을 구원하려는 소망이 실패를 하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열방을 새롭게 하려는 소명이 실패를 하는데 이제 참이스라엘인 된 예수님, 메시야 안에서 열방을 구원하는 구원이 성취 되었다.” 이복음을 믿는 하나님은 믿음을 주었다. 이 복음을 믿음으로 메시야인 예수님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

로마서 4장의 요점은

아브라함이 믿음로 의롭게 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하신 자신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은 압르함에게 전 세계를 아루르는 가족을 주신다는 것이며 그 가족의 이름표는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418-22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능력을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상황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눈을 돌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데 눈을 돌리는 믿음이 었다.

 

로마서 4장의 요점은 단순히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방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4:16절에서 누가 아브라함의가족인가?에 있다. [갈라디아서 3장과비슷하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을 때 가족은 전 가족을 위한 것이며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가족이다.

41절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육체를 따라 우리의 조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겠는가?

4-8절아브라함은 불경건한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에게 불의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5절에서 아브라함은 약속에 따라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고 주장을 한다.

이 믿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417절에 죽은 자를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창세기 155절 하늘에 별들 보다 많은 가족을 그가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신 약속, 즉 그에게 위대한 한 가족을 주시겠다는 언약의 핵심은 처음부터 줄곧 이 언약을 통하여 죄가 용서될 것이라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었다. 최초의 언약의 수립도 죄사함의 원칙을 구체화 하고 있다. 3:21-425

그러면 이 아브라함의 약속이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 해당되는가? 아니면 무할례자들에게도 해당이 되는가? 무할례자들에게도 해당이 된다. 왜 아브라함의 약속안에 죄사함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죄는 것은 육체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을 때 아브라함이 무할례때이다. 아브라함은 무할례 상태에서 믿음으로 소유하게 된 언약적인 신분에 대한 증표이자 보증으로서 할례를 받았다.

 

로마서 5-8장은

로마서 58장은 하나님께서 의롭다 사신 사람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8:30]

51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이 단락은 지금까지 논의를 요약하는 새로운 단락의 서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전의 논의에 기초하여 새로운 주장을 전재하는 서문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결과물이다. 칭의의 효과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화해이다. 칭의는 실제적인 관계에서 법정적,언약적, 종말론적 상황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래서 언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결혼 계약으로 이해 되었다.

이사야 53장에 종이 사역

이사야 54장에 언약의 재수립

이사야 55장에 새 창조의 열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

63백성이 칭의에서 영화로 옮겨지는 영역이 포함된다.

 

영화롭게 옮기는 영역안에서

인류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피조 세계도 구원에 동참을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언약이 갱신된 피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5: 17] 이 통치는 은혜의 통치가 되어야 한다. [5“:21] 이 은혜의 통치는 하나님의 구속한 새로운 세상 속에서 개인을 위한 영생을 일으킬 뿐만아니라. 세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이스라엘이 학수 고대한 올 시대를 여는 것이다. [8:18-26]

이것이 온 세상을 유법으로 받게 될 것 [4:13]

 

로마서 6장의 내용

로마서 6장은 물을 통과하여 그 결과 자유롭게 된 종에 대한 이야기이다. 출애굽기 신학이다. 세례는 이지비트에서의 탈출과 약속된 땅으로의 여정이라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되풀이 한다. 이 약속된땅은 롬 8장에서 말하는 총체적인 새창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8장 칭의 어떻게 이해할까?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이스라엘의 멸망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르심

여호수아 24:2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을 섬겼으나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였다. 아브라함은 어디에서 부르심을 받았는가? 이방인의 땅 갈데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였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면서 이루어진다.

구약과 이스라엘의 신학에서는 항상 구원은 태초 아담의 회복을 의미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에서의 구원은 출애굽이다.   구약에서 출애굽사건으로서 구원은 태초의 에덴동산의 낙원의 회복으로 보았다.

 

1] 물공급과 만나의 공급-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라든지 광야에서 공급받은 므리바의 물공급은 아담이 타락 전에 낙원에서 누렸던 에덴동산의 축복의 회복 재현한 것으로 봤다.

고전 10:1-4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른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니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음료는 신령한 양식이며, 신령한 음료를 공급하는 바위가 광야 생활 내내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다니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물의 원천이 광야 생활내내 이스라엘을 따라 다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는 것은 물의 원천이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움직이는 우물이 그리스도이다. 이렇게 바울이 말한 것이다.

 

 2]모세가 시내산에서 얼굴이 영광으로 충만한사건- 시내에서 모세에게 얼굴이 눈이 부실정도로 영광이 충만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 그 얼굴에 빛났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의 회복으로 보았다.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였다.

 

출애굽의 역사

이스라엘은 출애굽에서 유월절을 통하여 구출을 받은 다음에 광야에서 다스 에굽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주시는 율법과 하나님의 인도로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땅에 가는 것이 에굽에서 노예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을 만든다. 그결과 약속의 땅 가나안땅을 박탈당하는 위기에 서있었다.

이때 모세가 기도를 한다. 위기를 면한다.

성경은 계속 경고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선물인 애굽에서 노예의 상태에서와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스스로 실현하여야 한다고 경고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나안땅에서도 땅을 잃고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을 경고한다.

 

가나안땅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상실을 한니다.

 

가나안땅에서 바벨론 포로가 됨으로 이스라엘의 이름상실

이스라엘 사람이 그들의 공식 명칭이다 . 그러던 것이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이 때 북쪽에 속했던 열 지파가 완전히 이스라엘로 사라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질 리야 없지만 앗수르국가의 이주와 혼합 정책으로 그만 북 쪽 지파가 혼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이방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선민의 명예로운 이름을 간직한 유일한 지파로 남쪽의 유다 지파만이 남게 된 것이 다. 그래서 선민을 부를 때 이스라엘이라는 말 대신 유다인 혹은 유대인이란 말이 사용 된 것이다.

유다역시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망한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 왕 선전 제사장 땅 모든 것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존재하기 않는다는 것이다.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다. 하나님의 언약에 재접촉을 하려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이들에게 정말 아직도 유효하는가? 확인하기 위하여 그들의 자신의 뿌리를 찾아 올라간다.

 

여호수아서 사사기서, 사무엘서 상하 열왕기서 상하

여호수아서 사사기서, 사무엘서 상하 열왕기서 상하에서는 신명기적 역사라고 부른다. 이책들은 신명기의 주제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의 주제는 이스라엘이 예배처소를 반드시 지정한 한 장소인 예루살렘에서만 예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출애굽기의 역사는 성막에서 예배를 하여야 하였고 유월절의 식사도 가정이나. 마을에서 하여야 하였다.

신명기 12장은 이스라엘의 예배는 가정이나 마을이 아닌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다.

12:5“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가서

신명기 16장은 유월절의 식사는 아무마을이 아닌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신려고 택한 장소인 예루살렘에 성전에서 유월절의 식사를 하여야 하였다. [16:5-6]

 

사무엘서 상하 열왕기서 상하

사무엘서 상하 열왕기서 상하는 바벨론 포로기에 이스라엘 대상으로 쓰여진 책이다.

왜 우리는 약속의 땅 가안안 땅에서 좇겨나게 되었는가? 이 답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왕들이 에굽에서 구원하여 낸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가나안 땅 거짓 신을 섬겼다는 것이다.

 

사무엘서 상하 열왕기서 상하는 신명기의 주제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무엘서 상하 열왕기서 상하에서의 왕들이 신명기의 주제인 예배처소 중앙화를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였는가? 이것이 이스라엘의 성패를 좌우하였다.

가나안 신들의 우상을 부수고 예배처소 중앙화를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였는가에 있다.

북 이스라엘의 20명의 왕들 중에 호세아와 샬롬 만이 이러한 노력을 하였다.

유다는 20명의 왕들 중에 히스기아와 요시아 만이 이러한 노력을 하였다.

 

또 이스라엘이 왜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였는지를 설명을 한다.

열왕기서는 유다의 마지막왕인 여호와긴이 포로로 잡혀간후에 이스라엘의 포로기의 중간기에 열왕기서를 마무리를 한다.

역대상 역대하

역대기서는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에서와 달리 역대기상하에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한 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희망을 주고 하나님과의 언약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기위하여 쓰여진 책이다.

 

역대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과거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이 가능한지 큰 맹락에서 해설하려 하였다.

포로생활에서 귀한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인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도 유효한가? ,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깨어진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들이 아직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를 수 있는가?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용기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북돋운다.

 

사무엘서 상하 열왕기서 상하처럼 우리가 어떻게 바벨론의 포로 생활로 전락을 하게 되었는가? 가 아니라. 유배 생활에서 돌아와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 이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대기 서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 됨을 강조한다. 열왕기 상 1-2장에서는 권력투쟁에 대한 기록이 없다.

 

올바른 예배의 중요성과 예배를 위한 왕에 대한 역할의 중요성을 솔로몬의 왕을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한다. 그리고 인과응보에 대한 신앙을 강조한다. 죄에 대한 책임과 순종에 대한 복이 주어진다고 강조한다. 인과응보에 대한 신앙을 강조는 조상들에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이제 이스라엘이 공동체 에게 순종하여 이스라엘의 국가의 재건을 하기 위하여 교육을 하기 위한 것이다.

 

다니엘서에서 9자에서 다니엑의 기도

 

비평과 재 요약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에서의 칭의의 근거가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의 근거는 개혁주의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새관점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한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된 유대 백성은,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하는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다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져야한다.

톰 라이트는 새관점의 근간을 이루는 언약적 율법주의를 재구성하기 위해서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과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의 슈바이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이번 글에서는 간단하게나마 톰 라이트가 어떻게 케제만과 슈바이처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의즉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이라는 사상이 자리잡고있다.

새관점의 언약 사상은 개혁주의 언약 사상과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있다.

개혁주의 언약 사상에, 그리스도가 중심에 자리잡고있다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언약 사상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중심에 자리잡고있다.

개혁주의에서 아브라함 언약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이땅에 구현되었다고 보고있다면, 새관점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하여 구현되었다고 보고있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에 있으며,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신실하게 이행되는 과정이었기에, 출애굽 자체가 구원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는 구원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과정을 통하여 은혜 안에 머물고 있는 상태였기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삶의 지침으로 주어졌다고 말한다.

이를 언약적 율법주의, 혹은 신율주의,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부르며,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율법주의,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려고했다는 관점과 차이를 보여주고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하여 개혁주의에서는 언약 백성의 근거가되는 의, 즉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인 성도들 안에 구현된 것이라는 관점과 달리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현되었다고 말한다.

 

개혁주의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의 성도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보는 반면에,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보고있다.

새관점이 보여주는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냐에 대한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자.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covenantal faithfulness)

 

새관점의 핵심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에 있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자신의 약속,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말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N. T. Wright, 96)

 

라이트는 이를, 창조 세계를 회복하고 새롭게하려는 언약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을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함으로서, 고린도후서 521절에서의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바꾸어 해석한다.(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N. T. Wright, 305)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에 대한 70인 역(septuagint)의 해석이 하나님 자신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God's own faithfulness to his promisses to the covenant”이라고 말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96)

 

이사야서 40-55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의 한 가지 면을 나타내주는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의 완고함과 상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셨고 이스라엘은 이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한편으로는 그의 신실하심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심과 어원이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에 나타난 그의 그림의 중심에는 고통받는 종의 이상한 모습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목적이 이를 통하여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불의에 대하여 벌을 주시고 의에 대하여는 상주시는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한 행하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 44)

여기서 톰 라이트는, 죄에 대한 용서를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과 연계시킨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 안에서 아담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우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톰 라이트는 구약과 유대주의에서 이 하나님의 의라는 용어를 법정적인 비유로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고있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을 재판관의 판결을 거칠 필요가 없는 법정적 심판의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함으로서, 죄의 문제가 법정적 판결이 없이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법정적 판결의 과정을 요구하는데 반하여 톰 라이트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항목이 법정적 평결을 대신 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죄인이 법정적인 평결없이 법정적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 44)

 

하지만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의로 연결되어,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언약 안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반드시 재판관의 평결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의( the righteousness of God)나 칭의(justification)라는 용어는 완전히 별률적이거나 법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이트는 로마서1:17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언약에 신실하신 분 즉 약속을 지키시는 분으로 묘사할뿐, 심판자로서 의를 세우시며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 즉 정의를 세우시는 분으로 묘사하지 않는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 62)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불트만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케제만은 슈바이처의 옛 탐구와 구별된 새 탐구를 시작하였다.

 

톰 라이트의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역사적 예수 탐구는 케제만의 새 탐구의 영역에 속하여있다.

 

라이트는 케제만의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하여 긍정적 입장을 취한다.

 

톰 라이트는, “1,2차 세계대전 동안에 교회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비역사적 예수가 제시되어, 나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했다는 에른스트 케제만의 19531023일 행한 연설에 동의한다.(Challenge of Jesus, 21)

 

불트만학파인 에른스트 케제만이 로마서 117절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 이후부터, 라이트는 이를 보편화 영구화 시키고있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 64)

 

 

라이트는 케제만의 관계론적 칭의론,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심, “하나님 나라로의 이전이라는 관계적 칭의를, 윤리로서의 성화와 연계시켜 칭의와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한다.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케제만은 불트만의 제자로서, 불트만의 인간론 중심적이고 개인론 중심적인 해석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의''뒤틀린 온 세상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힘'으로 해석한다.

 

2. 케제만은 칭의론을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21)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전통적인 개념과 달리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해석한다.

 

이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케제만(Ka:semann)의 해석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과 동일하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63)

 

케제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씻어 버리고 덮어버리는 제사expiation”로 해석한다.

 

이는 죄에 대하여 벌을 주고 의에 대하여 상을 주는 법정적 의미로서의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속죄 개념인 형벌적 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theory of atonement)”과는 다른 것이다.

 

3. 케제만은 칭의의 관계론적 의미를 중시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의를 자신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라고 말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84)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창조주가 타락한 자신의 피조물들을 자신의 주권 아래로 회복시키는 힘이다.

 

4. 케제만은 칭의를 주권의 전이(lordship- transfer/ lordship-change)”로 해석한다.

 

주권적 전이는 아담적 죄인들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사단의 통치 아래서 해방하여(여기에 죄용서가 내포됨) 자신의 통치(하나님 나라) 아래로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85)

 

하나님의 의를 케제만의 주장처럼 주권의 전이라고한다면, 주권의 전이가 구원을 뜻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주권의 전이는 신자의 믿음을 전제로하지 않는다.

 

이는,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본질적 죄인이라는 고백이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법정적 속죄사역에 대한 인식이 없어도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우리의 아담적 죄를 용서하여 주셨기에,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윤리가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은혜 아래 거하였다는 새관점의 주장은, 일종의 주권의 전이에 의한 결과의 한 가지 형태인 것이다.

 

주권의 전이 개념에서, 가나안에서의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어지는 윤리로 주어진 것이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모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만약에 요구되어지는 윤리적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권적 전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되는 새관점의 주장은, 행위 구원론으로 귀착될 수 밖에 없으며,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우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구원이 신인협력에 의한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

 

톰 라이트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역사적 예수 탐구에 모든 것을 걸어놓고있다.

역사적 예수 탐구를 하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예수가 실제 누구였는지를 모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라이마루스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로 인하여 성경의 예수가 누구였는지 연구되기 시작했으며, 지금 제 3의 탐구에 의하여 밝혀진 예수가 진짜라면, 이제까지의 성경에 대한 해석은 전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를 포함하여, 루터나 칼빈을 비롯하여, 개혁주의 신학자 전부가 이제껏 잘못 만들어진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다.

라이트의 성경 해석은, 20세기 말 상황에서의 슈바이처 라인에서 제3의 탐구에 의한 것이다.

슈바이처의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예수를 1세기 유대교의 맥락에서 철저하게 재구성함으로서, 예수 연구에 대한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한다.

 

톰 라이트에게 슈바이처의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라이마루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됨으로서, 옛 탐구와 구분되는 새 탐구로서의 제 3의 탐구를 시작하게 한다.

 

슈바이처의 철저한 종말론은 예수를 1세기 유대교의 묵시적 기대를 품은 자로 보고있다.

 

브레데 노선과 구별된 슈바이처의 노선은 역사적 재구성을 향한 최고의 전망으로 제시되면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시발점이 되었다.

 

 

윌리엄 브레데(William Wrede)와는 달리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두었던 슈바이처는 톰 라이트에게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을 제공하였던 것이다.(예수의 도전, 119)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영역에서 슈바이처의 바울 해석에 많은 도움을 받고있다.

 

불트만은 슈바이처와 달리, 예수와 바울을 대립 시키지 않는 반면에, 슈바이처는 브레데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킴으로서, 바울이 예수와 다른 어떤 종교를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구속받은 구속자라는 실존주의적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서, 예수의 실존을 유대교와 연결시켜 해석하고있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유대교에서의 실존적 완성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예수의 유대교에서의 실존적 완성이라는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개념은,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다는 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와 맥락을 같이한다.

 

슈바이처는 윌리엄 브레데(William Wrede)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키지만,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둠으로서 브레데와 차이를 보이고있다.

 

톰 라이트는 브레데의 생각에 동의를 못하다가,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두는 슈바이처의 견해에는 상당히 공감하게 되었다.(예수의 도전, 119)

 

라이트는 자신이 슈바이처의 접근과 비슷한 접근을 한다고 말한다

 

슈바이처의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은, 톰 라이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라는 범주 안에 귀속시키는 틀을 제공한다.

 

슈바이처가, 바울이 예수와는 다른 종말론의 체계를 가지고있다는 바울과 예수의 대립관계를, 유대주의적 묵시 문학의 맥락에서 해결한 것은, 톰 라이트가 예수를 유대주의적 메시아, 즉 유대를 해방시키기 위한 혁명적 메시아라는 사상의 밑거름이 된다.

 

이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의를 유대교에 편입시킴으로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 즉 아브라함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 하나님의 의를 완성시키신 분으로 제한 시킨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를 통해, 바울의 기독론을 유대주의적 메시아 사상에 귀속시킴으로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틀을 완성시켜 나간다.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바울의 서신서에 나타난 기독론이 유대주의적 메시아 개념을 바울 자신이 특별하게 발전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을 빌려온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라이트의 의의 개념에는, “칭의를 순전히 법정적으로만 이해하는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는 슈바이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행위 구원론적 의의 개념이 추가된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은 슈바이처가, 법정적 칭의론이 갖는 윤리의 부재에 대하여 우려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을 대입시킴으로서, 결핍된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려한다.

 

비평

 

톰 라이트는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하나님의 의의 개념에 도입한다.

 

하나님의 의를 케제만의 주장처럼 주권의 전이라고한다면, 주권의 전이가 구원을 뜻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람들의 믿음을 전제로하고있지 않다.

 

구원을 위해 자신들이 본질적 죄인이라는 고백도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법정적 속죄사역에 대한 인식도 필요없다.

 

케제만의 주권의 전이는 언약적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의 토대가 된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어지는 윤리는, 새관점 학파가 주장하는 것과같이 율법이었으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모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되었다.

 

새관점주의자에게는 의의 근거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의에 있기에, 예수는 의의 근거가 되지 않으며,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따름의 대상일 뿐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주권적 전이에 의해서 요구되어지는 윤리적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새관점의 주장은 행위 구원론으로 귀착될 수 밖에 없으며,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우스의 주장과 같이, 구원을 신인협력에 의한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주권적 전이에 의한 하나님의 의는 구원의 은혜의 선물이지만, 그 선물은 하나님의 주권적 주장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주권적 주장이 의무적 요구 조건이 되기에, 요구 조건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 것이다.

 

케제만의 주장과 같이,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고 자신의 나라로 이전 시켜 자신의 백성으로 만듬으로써,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한다는 요구, 즉 윤리적 의무를 담고있다면 윤리는 구원의 조건이 된다.

 

조건이 있는 은혜는 은혜가 될 수 없다.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 개념이나, 슈바이처의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은 동일하게 유대주의적 공로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은혜가 참다운 은혜되려면 인간의 공로가 요구되어서는 안된다.

 

어떠한 인간의 공로도 하나님의 기준을 맞출 수가 없으며, 이는 인간이 값을 주고 하나님께 이익을 취하는 거래 행위 밖에는 안된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기에, 어떠한 형태의 공로도 취할 수 없는 존재이다.

 

슈바이처나 케제만, 톰 라이트가 공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며,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에 가능한 것이다.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자는 오직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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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에노스와 기도 admin 2019.09.21 9
59 진정한 기독교 정치 운동 admin 2019.09.21 11
58 예수 부활 논쟁: 존 도미닉 크로산과 N. T. 라이트의 대화 admin 2019.09.21 10
57 젤롯- 레자 아슬란의 예수론 요약과 비판 admin 2019.09.21 12
56 인간현상- 샤르댕책 요약 admin 2019.09.21 8
55 하나님의 칭의론 [맥그레스] 1장 칭의 개념 발생 요약 admin 2019.04.20 94
54 아담의 창조 베르스티그 요약 admin 2019.04.20 51
53 성육신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 요약 admin 2019.04.20 43
52 아담의 진화 피터엔즈책 요약 admin 2019.04.20 76
51 어거스틴의 구원이해 admin 2019.04.20 49
50 21세기를 위한 21가지의 제안 요약 [유발 하라리 ] admin 2019.03.13 122
49 호모데오스 요약 [유밯하라리] admin 2019.02.26 113
48 영적전쟁이해 1 admin 2018.11.27 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