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겨찾기
  • 로그인
  • 회원가입
  • 홈
  • 가입인사
  • 새가족안내
  • 교회생활안내
  • 예배안내
  • 김봉길목사저서

logo

설교영상

창세기 1-21장 요약 정리

2019.09.21 09:57

admin 조회 수:22

구약 창세기 1-21장 요약 정리

 

구약강해 서론 1

창세기 1창세기 21장 요약

 

 

저는 구약성경을 전체를 한번 읽게 하기 위하여 오늘부터 창세기부터 말라지까지 성경을 개괄하여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때 성도들은 수요일에 성경의 이야기를 듣고 집에가서 거기에 해당되는 성경을 두 세번 반복하여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구약성경은 어떤 구조와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일단은 구약은 36권으로 이루어지고 신약은 27권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구약의 성경은 어떤 책인가?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사랑을 가르쳐 주거나 구원을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기독교 신자들조차도 구약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구원을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성경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구약의 중심의 내용이냐?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기록해 놓은 역사적인 책이라고 말하기도합니다.

구약에는 구원의 방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생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성경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신자들의 삶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구약성경을 협소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광범위하게 보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성경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건설이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파괴가 되었고,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건설 될 것인가를 기록하여 놓은 책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주제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성경은 4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첫 번째의 부분은 모세 5경이 있습니다. 창 출 래 민 신입니다.

모세 5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구성이 됩니다. 이 책을 모세 5경이라고 부릅니다.

원래는 다섯 권의 책은 한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모세 주전 5세기경에 기록하였습니다.

구약의 성경중에 이 책이 가장 중요합니다.

나머지의 책들은 이 책을 중심하여 쓰여진 책입니다. 모세 오경이 기준이 되어서 다른 성경이 쓰여졌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모세 5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실패를 하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택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여 가시는 지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리고 언약과 율법을 주시는 것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버레쉬트 -태초에라는 단어입니다. 시작이라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는 무엇을 시작하는 책인가? 하나님의 나라의 기원의 책입니다. 세상의 존재의 기원이 나옵니다. 창세기는 세상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와 원리의 시작이 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생겼고 우주는 어떻게 지어졌는가?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기에 인간이 무엇을 지양하여야 하는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의미를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민족의 시작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창세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출애굽기는 구속의 책입니다. 구원과 구속은 다릅니다.

구원은 질병에서 해방되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것이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부패와 인간이 가지는 근원적인 고통을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근원적인 부패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근원의 부패에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구속은 속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하는데 희생을 뎃가로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독생자의 피 값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가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속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책입니다.

이스라엘이 국가가 되기 전에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것에서 값을 지불하고 구원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양의 피를 바르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이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게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언약을 맺는 사건입니다.

 

성막을 만들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입니다.

 

 

레우기는

제사장들의 매뉴얼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어떻게 드리는가를 성경을 찾아서 매뉴얼을 찾아서 제사하는 것입니다.

책 전체가 제사장의 매뉴얼이면서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과 십자가의 목적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 흠이 없는 양을 구별하는 것, 부정하는 짐승과 정결한 짐승, 인간이 부정할 때 아스라엘에서 구별하여 다른 곳에서 구분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ᅟᅡᆮ.

제사에 있어서의 구별,

음식의 구별 위생에 구별이 있습니다.

 

이때는 대 제사장들이 의사 였습니다. 어떤 것이 구별된 삶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사를 통하여 십자가를 고백합니다.

 

민수기

백성들의 수를 세는 기록입니다. 인도의 책입니다.가데스 반야에서 광야에서 인도하는 하나님의 인도를 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이 섭리입니다.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고 우주를 이끌어갑니다. 참새의 한 마리도 이땅에서 떨어지지 않도록하는 것입니다. 이땅에 우리를 보호하고 위험에서 보호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훈련이라는 요소가 들어갑니다. 나의 인생에는 전체의 훈련입니다. 짓이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당장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주님을 바라 보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반역을 합니다.

애굽에서 구원 받은 백성들의 수를 기록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여호수아 갈렙만 남고 새로운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의 수를 세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새로운 백성들이 살아야야 할것인가?

거듭 명령한다. 두 번째의 율법입니다.

출애굽기의 10계 율법을 받은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그래서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다시 한번 갱신된 율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선지서입니다. 소선지서 대 선지서가 있습니다.

대 선지서와 소 선지서

언약백성으로서의 삶을 모세 5경의 괴도 이탈을 하지 않도록 설교자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설교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목사님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 선지자들은 모세 오경을 기준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에 기준하여 어떻게 사는 가를 살피고 거기에 필요한 설교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책이 선지서입니다.

선지자들은 무엇을 기준하여 설교를 하였느냐? 모세 요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였다고 하는데 바로 이 모세 5경을 묵상하였습니다.

 

3] 역사서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열광기 상하 역대 상하 에스라 느혜미야 에스더까지

모세 오경은 애굽에서 이끌어 나와서 가나안땅에 들어기 전까지의 내용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가나안땅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새로운 명령을 주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역사서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정착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착민으로서 기록입니다.

역사서는 하나님의 반역의 역사입니다. 반역하는 상황에 대하여 징계와 구원의 내용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국가로서 자리를 잡기 전의 시대입니다.

모세 5경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가 삶이고 평가입니다.

 

4]시가서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시가서 이 내용은 기도와 지혜입니다.

시편은 기도입니다. 기도 집이면서 예배도중에 찬양에 사용된 찬양집입니다. 모세 5경은 중심한 내용을 소화하여서 죄 시판과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에 대하여 기도 내용속에 신앙의 수준과 깊이가 다 들어 있습니다. 기복적인 사람은 기복적인 것에 대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과심을 가지고 기도하면 자기의 좌와 심판과 구원에 대하여 기도 할 것입니다.

지혜는 잠언 전도 욥기 아가서입니다.

경험과 관찰을 통하여 삶의 원리와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 내서 성경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원리를 깨닳은 것을 성경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많이 살펴보는 결과 이렇다 이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하나님의 나라 입장에서 관찰하여 놓은 것이 잠언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정신과 의미 가치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정신과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가치와 의미가 다 퇴락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적인 삶을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회와 세상에 책임을 지는 것을 마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창세기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의 내용은 쉽습니다. 천지 창조의 이야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노아의 이야기.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이야기 이러한 내용이기에 읽기에 쉽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해석은 구약의 성경 중에서 가장 어려운 책입니다.

창세기는 천지 창조의 이야기를 말하려는 책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신학적인 설명과 교훈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천지 창조의 이야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노아의 이야기.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이야기 반드시 신학적인 설명과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 이러한 창조의 내용이 아니라 창조에 대한 해석을 하여야 합니다.

천지의 창조는 첫 번째의 해석은 두 개의 피조물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세상입니다. 두 번째는 아담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자존 즉 아브라함과 신앙공동체는 말씀으로부터 새롭게생겨 난 자들입니다, 세상도 인간인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둘은 한분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의 이야기의 해석은 하나님이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상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담의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참 이솝의 이야기처럼 쉽습니다. 그러냐 해석은 어렵습니다. 아담의 하와 이야기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한 특정한 인물인 아담이 하나님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증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실패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즉 공통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증인이 되게 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세상을 부르시고 또한 특정한 공동체를 부르신다는 내용입니다. 두 개의 피조물곧 세상과 신앙공동체는 말씀으로부터 새롭게생겨 난 자들입니다, 이 둘은 한분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적인 삶을 살야야 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 부르심에 반영되어 있는 선물(gifts)과 그 부르심들에 나타나있는 요구(demands)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들에 의해 생겨난 인간의 반응(responses) 등에 관심을 갖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부르심, 노아의 부르심,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부르시는 내용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구원의 성격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성격과 하나님의 특별한 성품이 어떠한가를 밝혀준 것입니다. 또한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고서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피조물들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소명이 무엇인가를 밝혀준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해석에서 어려운 부분입니다.

 

아담의 부르심, 노아의 부르심,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부르시는 내용에는 하나님어떤 분인지 자기의 계시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까지도 약속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자신의 약속이 성취되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은 약속을 받은 자에게서 순종과 응답과 신실함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부르신 자나 부름을 받은 자가 똑같이 (perhaps) 신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핵심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과 세상[아담]/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특별한관계가 부르심과 응답의 관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구원으로 부르심의 본질은 언약입니다. 하나님과 약속으로 시작을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세 가지의 하나님의 언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 가지의 약속이 있습니다.

1]아담의 언약

2]노아의 언약

3]아브라함과의 언약입니다.

 

언약 [계약] 개념은 구원에 대한 두 가지의 신학적인 주장이 있습니다. (11: 15 - 19 참조).

첫 째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을 위한 뚜렷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1: 15 - 19 참조). 어떤 목적과 뜻일까? 피조물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하나님은 계속해서 피조물에게 말씀하시며피조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신실하게 응답하고 기꺼이 순종하도록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은 자유롭게 지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만들어 져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만들어 지고 버림받은 채로 방치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피조물은 자기 멋대로 활동하도록 만들어 진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조주의 의도가 강제적인 방법으로 실행되거나 억압하는 힘으로 피조물에게 강요된 다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주하나님은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인간의 뜻을 존중하신 것입니다. 창조주는 피조물의 자유를 진지하게 고려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주권적인 통치는 신실함인내번민 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표현된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과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 째로창조주의 목적에 전적으로의 존하는 피조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응답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본문들이 보여 주듯이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에는 신실한 순종과 반항적인 자기주장이 뒤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구약에서 십자가의 구원에서 가장 중요하는 단어가 언약이란 단어입니다.

계약이란?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로 연결되어 영생하도록 맺는 것입니다.

팔커 로벗슨 박사는 계약 신학과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언약이란 하나님이 구원할 사람을 본드처럼 하나로 북은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서로 소유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언약은 피로 맺은 약정이다. 약정은 본드입니다. 되지 본드 강력본드라는 뜻입니다. 언약은 계약입니다. 카버넌트입니다.

그런데 언약의 관계가 깨어지면 피 흘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본드로 붙여지는 것입니다. 언약이 파괴되는 것은 피흘림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언약적인 죽음이다. 본드의 성경을 가지는 언약이다.

십자가는 나의 죄만을 위하여 죽었다. 이것은 약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창세기

창세기는 세 시대로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1. 아담의 언약을 중심으로 하는 내용입니다.

아담의 언약을 시작의 언약 시작의 계약이라고 합니다.

1] 첫 번째의 시대 아담과 노아시대까지입니다. “ 세상의 시작과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창세기1: 1~11: 29의 원역사pre - histoη)는 창조에덴동산가인과 아벨홍수이야기바벨탑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창세기 1:1-8:18절의 내용입니다.

 

창세기 314,15절에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내용을 뱀에게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한번 보시죠

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제 여자의 후손과 사탄의 후손간의 대립이 시작이 됩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수며 사탄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됨으로 인간이 구원이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17절에서 하와가 여자로서 아이를 낳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사탄의 후손과 대결을 위하여 탄생을 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1-8장의 주요 관심사는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하나님의 신실한 존재가 되게끔 부르시고 있음을 증언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게 부르셨습니다만 인간이 타락으로 세상으로 땅 끝까지 흩어져 다른 언어를 가진 많은 국가들로 만들어진 시대입니다. [2;4-8;19]

여기의 내용은 아담에게서 두 아들이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이 두 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족속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섬기고 가인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족속입니다. 이 민족의 구분은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거룩한 씨를 준비하고 보전할 목적으로 경건한 자와 경건치 않는 자를 구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과 아벨입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의 족속이 퍼져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족속이 혼합하여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존재로서 부르시는 세상과 인간이 실패를 하게 됩니다.

두 번째의 시대는 노아에서 아브라함의 시대입니다. [8:19-11:26]

준비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의 족속과 지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신앙의 문제곧 땅의 약속과 상속인의 약속에 대한 신뢰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세 번째의 시대는 족장의 시대입니다. [창세기 12:1- 창세기 끝까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요셉의 죽음까지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부터 구속의 이야기가 시작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요셉의 이야기 인 족상의 시대를 구속이 시작되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속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세 족장의 생활이 나옵니다. 이삭, 에서, 야곱의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인류는 한 가족의 역사로 집약이 됩니다. 이 백성이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백성으로 증가 할 것입니다. 이 족속이 가나안땅을 영원히 소유하게 될 것을 약속을 합니다.

 

이 족장의 시대에는 세가지의 핵심이 나옵니다.

1)하나님의 구속의 부르심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통하여 시작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몇 차례의 불순종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자로 나타난 자입니다. 첫 번째의 극적인 긴장은 창12 : 1~3에 있는 처음의 약속으로부터 창22 : 1~14에 있는 시험과 창22 : 15 ~ 18에 있는 약속의 재확인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2) 창세기25 : 19~36 : 43.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강한 자 에서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을 택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한 내용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 : 27~29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훈련으로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야곱의 삶속에 널리 퍼져있는 갈등들로 인하여 우리는 야곱이야기를갈등에 직면하면서 훈련으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야곱에게 끊이지 않는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이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의 응답으로 해결하는 것을 봅니다.

 

야곱의 부르심은 과연 동생이 형을 다스릴 것인가?’ 하는 부르심이 야곱이야기의 중심주제로서그에 대한 해답은 창 33 : 1 ~ 17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3) 창세기37 : 1~50 : 26의 내용인 감추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요셉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야기에서37 : 5~9의 꿈은 요셉의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의 중심주제입니다.

시작의 역사

1] 천지에 대하여 [1:1-4:26]

2] 아담에 대한 이야기 [5:1-6:8]

3] 노아에 대하여 [6:9-9:29]

 

보존의 역사 [8:19-11:26]

4] 노아의 아들에 대하여[10:1- 11:9]

5] 노아의 아들 셈에 대하여[11:10-26]

 

구속의 역사

6] 대라에 대하여 [11:27-25:11]

7] 이스마엘에 대하여[25:12-18]

8] 이삭에 대하여[ 25:19-35:29]

9] 에서에 대하여 [36: 1-43]

10 야곱에 대하여 [37: 1-50:26]

 

창세기의 내용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창세기 1

창세기 1장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여섯 째 날에 하나님의 형성에 따라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본래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의존적인 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인간의 위치는 모든 피조물의 면류관이요. 피조물을 다르시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세우신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시편 8;4-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의 머리요 면류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책임이 있습니다.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책임을 부여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영역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문화에도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책임을 주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이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가도록 책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이 땅에 이루지시도록 인간에게 책임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안 될 때 하나님은 선지자들 설교를 통하여 책망을 합니다.

 

창조하시니라 [빠라] ‘창조하다라는 낱말은 그냥 물건을 만들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조하다는 뜻은 하나님과 독립적인 생명을 뜻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속해있음을 뜻한 단어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으로 그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동시에 세상은 하나님께 속해있으며하나님 없이는 영원한 생명을 갖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만물이 주권적이고 은혜로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또 그에게 속해 있자는 것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다.

 

천지 창조는 단순히거기에있게끔 어떤 물건을 만드시는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은 하나님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피조물에 하나님은 어떻게든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불러냄으로서 창조하신다. 피조물은 말씀에 의하여 불러냄을 받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말씀은 인내와 긍휼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피조물은 목수가 만드는 어떤 물건이 아니다. 말씀으로 부르시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생명은 부드러우면서도 확실한 방식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창세기1 : 1~2 : 4에있는 창조주와 피조물사이의 관계는 강제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유롭고 은혜로운 헌신과 초청의 관계이다. 그관계는 요구나 의무보다는 신뢰

로 가득차 있다.

 

명령: ‘하나님이 가라사대"

실행 그대로 되니라

평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시간: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러한 시간구조는 그자체가 하나님의 평화로운 통치아래 있는 피조세계의 선한질서가 어떠 한 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창세기의 내용은 천지 창조와 인간의 타락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삭에서 야곱과 요셉의 죽음으로 창세기의 내용이 끝나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은 천지 창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창세기 1장을 천지 창조의 내용이다. 이렇게 말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시기 1장에서 천지 창조의 내용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원래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어떤 나라였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지혜로만 건설된 나라입니다. 그리고 창조하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세상이 하나님과 의존적은 관계로 지금도 우주를 운영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을 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인간은 하나님에게 의존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은 목적은 하나님의 의존적인 삶을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속에서의 섭리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며 낮의 해가 상하지 않고 달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도록 우주를 주관하십니다. 구원을 얻은 성도가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우주 환경을 주관하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심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하나님을 의존적으로 삶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섭리에서 죄란? 내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아니하고 탕자처럼 아버지의 의존적인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올라가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이고 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뜻은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리를 부여 받게 됩니다.

왕이 자신의 형상을 각 나라에 세우는 이유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곳들에까지 자신의 주권적인 통치가 미치고 있음을 강조하기위해서이다.

인간의 보살핌에 맡겨진 모든 다른 피조물들에게 자유와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한다 것입니다.

인간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으로 순종되어야 합니다.

1:9-12참고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권세와 책임성의 위임을 뜻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사하시는 것과 같은 권세를 말한 것입니다. 그 형상은 초청하고 불러내고 허용하는 창조적인 권세의 사용을 가리킨 것입니다.

 

정복개념은 동물에 대한 것입니다. 그 지배권은 동물을 보살피고 돌보며 먹이는 목자의 역할과 관련된 것입니다.

인간은 나머지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 받았지만 그것은 그들 위에서 굴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유익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고귀하게 하는 통치권입니다. 인간의 역할은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의도한 영광을 위한 완전한 피조물이 되게끔 하는 데에 있습니다.

 

전 세계를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어떻게 취급하시며 ,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하여 초래된 고초를 통하여 하나님의 원래 의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성취하시고 세상에 인간을 구원할 왕국을 건설하실 것인가를 길을 준비하시는 내용이 창세기의 1장의 내용입니다.

 

 

창세기 2장 에덴동산과 인간

 

인간이 거주할 아름다움 터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인간을 만드십니다.

인간은 흙으로 만드십니다. 흔히들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서 코에 생기를 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틀린 말입니다. 여기서 흙은 먼지입니다. 원소입니다. 먼지로 인간을 만드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호흡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영이 되었습니다. 생령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이 살만한 아름다운 동산을 주십니다.

에덴동산이라는 단어는 인간이 책임을 지고 있으며 동산에서의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의 왕국으로 창조하였고 하나님의 나라의 왕국이 되도록 섭리하였습니다. 천지 창조와 동시에 에덴은 하나님의 나라의 낙원이였습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의 낙원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아담에게 아름다운 동산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왕국을 사람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에게 하와라는 돕는 배필을 주십니다.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이 될 때 여자로서 최고의 운명과 행복을 깨달게 된다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것은 아내는 남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에덴에서 살아 갈 때에 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달성을 하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는 것은 아내를 지배하는 두목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나타나도록 이끌어야 할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리더 자로서 머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에덴동산이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나라는 주권[ 통치]가 있어야 하고 백성이 있어야 하고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라입니다. 에덴동산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통치가 있었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백성이 있습니다. 인간이 살만한 아름다운 동산 영토가 있습니다.

안식일 창세기 2;1-3절 안식의 의미

이스라엘에서 본래의 안식일은 예배의 날이 아니라 쉬는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앙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7일에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섭리의 섭리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산다는 신앙을 열방에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인간적인 노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음을 알게 해주는 안식이 필요함을 신앙으로 선언하고 있다.

동시에 모든 다른 신들과 다른 종교 및 다른 세계관등을 거부함을 하는 것입니다.

 

세계가 안전하게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선언 한 것입니다. 세계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을 중단 한다고 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계는 우리 자신의 노력들

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준수는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또 우리자신을 안전케 하려는 모든 노력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안식일의 행복이나 평등에 따라 운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상의 영역에서든 지상의 영역에서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 땅에서 확립된다면 피조물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안식에 거하게 되는 것을 미리 맛보고 또 그것을 기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에 의해 형성되는 새로운 평화가 올 것을 말없이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주일이 끝나서 안식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창조가 만족스럽게 잘 끝났기 때문에 안식하였습니다. 안식일에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안식도 7일에 일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6일에 사역의 평가가 하나님의 뜻에 만족할 때에 안식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복되게 하사 -

창세기는 세 번에 걸쳐이라는 낱말이 사용 된다. 창세기1;22절에서 살아있는 피조물

에게 복이라는 낱말이 사용 된다. 두 번째는 인간 피조물에게 (1:28절복이라는 낱말이 사용 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안식일에(2 : 3) 사용 되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에서도 생존과 건강한 삶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이 복을 세상이 거절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복을 하나님은 세상 안에 확실하게 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I. 2 : 4b~17 사람을 동산에 두심

n. 2 : 18~25 ‘돕는 배필을 만드심

ill. 3 : 1~7 동산에 들어온 훼방

lV. 3 : 8~24 심판과 추방

 

창세기 3장은 아담의 타락이 나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소명을 받았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음

에덴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란?

생명의 나무는 잠언에 의하면 그것은 삶을 증진시키고 경축하는 모든 것을 지칭합니다.

요한계시록2:7에서 생명나무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칭합니다. 생명의 나무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적인 삶을 삶으로 인간의 삶을 증진시키고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마다 경축하는 모든 것을 지칭합니다.

 

 

아담의 타락은 전체의 창조에 대한 죽음과 부패를 가져 왔습니다.[ 로마서 8:19이하] 그러나 한편으로 아담의 타락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를 말해주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인간이 구원받고 구속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에덴동산의 회복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영화가운데 회복될 것입니다. [65:17, 66,22, 벧후 3:13, 21:1]

인간이 생명의 과일을 먹음으로 인간의 삶을 증진시키고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마다 경축하는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타락후의 인간

첫 번째는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실존은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3: 15-16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나의 실존은, 나의 교만은, 나의 주권은 늘 한 시간도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과 싸우고 있습니다. 인간인 나는 아담의 타락후로 하나님과 갈등을 일으키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을 할수 없는 비참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 갈등을 일으키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과 나는 스스로 나를 구원을 할수 없는 비참에 빠졌다는 것, 이것을 이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으로 메시야에게 달려가게 되는 길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신앙이 성장하면 할수록 이 두 가지가 내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성장입니다.

 

세 번째는 인간은 선악을 알게 되어 스스로 자신의 일을 결정하게 된다. 그 이후 인간의 연약함을 스스로 께달케 된것입니다. 나는 옳은 길을 가려고 하여도,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나의 몸이 실재적으로 그릇된 것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사망의 법에서 누라 나를 건져 낼까? 내 나의 교만이 한 시간도 하나님과 싸우지 않는 시간이 없습니다. 계속하나님과 갈등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알아가게 되면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이제는 전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선한 길을 걸어가고 싶지만 인간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결정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3 :7의 벌거벗음과 창 3:8의 피신은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시기도 전에 이미 죽음의 세력에 자신을 드러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죽음의 세력이 자기를 주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음도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백성들을 구하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때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내가 누구관데 그들에게 갑니까? 하나님이 모세 너가 중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냐 안하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로서 새로운 정체성이 기독교인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한 직후에 사람에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타락 직후에 인간에게 형벌과 구속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에게 돌아갈 멸망의 길에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도우시기를 원하신다.

 

구원은 외부로부터의 율법적인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자발적인 순종의 마음을 주신다. [36: 26-2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실 수 있는 새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새 마음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바울이 변화되어 복음을 전하다가 몸을 감옥에 같혔고 다리는 착고에 채워져 있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고후 3:3-6]

 

하나님께 인간이 돌아가는 길 회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는 말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동일한 멧세지입니다. 같은 멧시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새 마음을 주시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내안에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성령이 나에게 새 마음을 주시면 죄를 미워하게 하십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주님에게 순종하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같은 것입니다.

 

청세기 3장 인간의 타락

시험과 유혹에 대하여 나옵니다.

시험의 배후에는 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은 그 배후에는 악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뱀은 에덴동산 당시에는 다른 동물보다 간교했습니다. 사탄은 이것을 자신의 계획을 위하여 도구로 사용합니다.

 

유혹은 두 가지의 과정으로 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감정입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너무하다. 하나님의 법이 너무하다 상식에 어긋난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말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죄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 전에는 죽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먹음으로서 이제는 필경 죽음을 인간이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흙과 싸움에서 흙이 사람을 정복하게 됩니다.

죄는 죽음과 동산으로부터 추방을 가져 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추방입니다. 죽음과 함께 하나님에게서 추방을 당합니다.

죄는 죽음과 함께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함께 가져 왔습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서 숨었나이다.

이미 인간의 삶이 이제는 하나님의 의존의 삶에서 자아에 의존하는 것으로 바꾸었다는 뜻입니다.

 

2강의

전주 복습 1-3장의 내용의 요약

창세기 12장의 내용은 창조의 목적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상에 두시고 아담과 하와의 이지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다스리게 함으로써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이 가득히 빛나게 될 것을 바랬습니다.

 

창세기 3장의 내용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의 편에 가담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을 다스리고 세상의 권세를 다 사탄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거룩한 문화를 건설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사명을 박탈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본연의 위치로 돌려놓으려는 구원의 계획을 시행하십니다.

사탄에게 말을 하는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님의 대속을 근거하여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아담과 하와를 본연의 위치에 돌려놓은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오게 하는 계획을 수립하시고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언약 약정을 하였습니다.

이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이 가득히 빛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시대적인 사명을 수행하야 합니다.

 

 

창세기 4-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이야기 이해

하와가 가인 아이를 낳음으로써 약속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확증됨으로 시작이 됩니다. 1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득남하였다.” 가인은 얻음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인 아들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아들을 낳고 즐거워하였던 것은 구원의 언약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여자의 후손구원의 언약이 이 아들 가인을 통하여 성취되리라는 신앙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두려움가운데 살게 됩니다. 가인은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축복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믿음없는 예배처럼 하나님께 뇌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가인의 제사- 대속의 원리를 무시하고 자신이 임의대로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는 믿음이 없는 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대속에 대한 무관심은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신앙을 이어 받은 것은 아벨입니다.

아벨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여야 하는데 죄를 대속하여야 한다는 아버지 어머니의 신앙인 속죄의 원리를 바르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아벨의 양의 제사- 양과 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죄로부터 자유를 얻어서 하나님과 화목하려는 속죄의 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임으로서 자기의 불의 에 대하여 힘으로 항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하여 자기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을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지배하였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이야기는 불경건한 가인의 삶과 경건한 아벨의 삶과 경건한 아벨의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를 중심의 주제로 성경의 내용을 이해한다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는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가인과 아벨의 형제와 하나님사이에 놓여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한 이야기보다 가인이라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결국 죄악으로 멸망을 가져 올 뿐이며 구원을 이루는데 전혀 쓸모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가인의 부패한 본성은 자기의 친동생을 죽입니다. 부패한 본성인 폭력은 하나님과의 일그러진 관계에서 비롯된 인간의 운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그러지는 것은 형제에게 폭력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는 이웃을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믿음이 없는 가인의 삶을 하나님과의 일그러진 관계에서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께서는 배 제사를 드리는 때에 예배드리기전의 관심을 형제문제에로 환기 시키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 관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전에 먼저 형제에게 원망 들을 일을 즉시 형제의 문제를 먼저 해결할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죄의 소원으로는 구원의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은 형제사랑과 부활을 연결 지어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요일3:14)), 그리고 형제를 미워함을 사망과 관련시킵니다. 형제 문제를 결국은 신악과 믿음의 위기로 이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부활의 경이는 형제간의 화해와 연결된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과 관련 된다는 것입니다. (요일3 : 14).

아벨의 죽음으로 이제 하나님은 예비하신 거룩한 씨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계열의 자손들로 죄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세계의 악을 초래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급속하게 부패한 역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부패가 얼마나 빠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에는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여 죄가 급속하게 번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가인이 첫 번째 아들이라는 점입니다. 앞으로 나올 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야곱과 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남은 창세기에서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묘사가 됩니다.

가인의 아들인 에녹은 자기의 이름으로 성을 쌓고 가인의 8대 손자 가들은 목축과 음악, 금속가공의 발명자가 됩니다. 라멕은 자기의 능력을 자신의 신으로 여기고 칼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라맥에서는 죄의 의식이 조금도 없어집니다.

인간에게 어떤 구원의 요소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방법으로 구원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셋이라는 아들을 준비 시킵니다. 하나님의 대속의 원리를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아담과 하와의 신앙을 이어받은 신앙 대속의 원리를 통해 영원히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셋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셋의 탄생이 구원의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시고 계시다는 확실한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셋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합니다. 여기서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을 합니다.

이 셋의 계보를 통하여 예배를 통하여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속적으로 유지 됩니다. 구속의 원리로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세상의 역사는 두 갈래로 흘러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여자의 후손 즉 하나님의 나라를 걸설하는 세력과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며 세상의 자신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가인의 후손의 나라 의 세력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는 가인보다 큰 것이며 가인을 지배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7 : 17)

죄는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에 대하여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죄를 지키지 않으면 자신의 분노와 우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에 직면한 가인의 삶을 삼키는 것입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그것을 다스릴 것이다"

가인의 죄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소원은 정상적인 인간 욕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왜곡된 삶의 어두운 측면에 속한 것이다.

죄에 대한 소원인 이미 죽음에 까지 몰고 가는 죄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처벌을 피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자라 할지라도 죄의 형벌가운데서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인자가 이제는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한다.(13-14) . 살인자는 이제 자기 자신에게 의존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가 주어진다. 죄와 은총을 동시에 상징하는 표가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표는 (15)은 여러 가지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창세기 5장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세대의 정리

창세기 5장은 가인이야기와 홍수이야기의 사이에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는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은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

창세기의 족보는 지금까지의 세계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로 접아 들고 있을 때마다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족보의 의미는 지금까지의 기록을 종합하여 정리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다시 하나님의 구원이 전개되는 것을 말하려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 셋의 후손들을 기록하면서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언약인 거룩한 씨를 어떻게 준비하여 가시는지 잘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족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족보 안에서, 역사 안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고 어떻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지 왜 역사를 주장하시고 계시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족보에 설명을 창세기에서 7군대가 나옵니다.

1)창세기 2:4절 창조의 족보입니다.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천치 창조의 사건을 정리하고 에덴동산에서의 새로운 내용을 이야기 하려는 것입니다.

2) 창세기5:1 아담의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아담의 족보의 정리의 의미란? 아담의 자녀들의 가인의 후손들은 죄의 속도가 너무 빠르게 전개 되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위하여 셋의 자손을 주신 내용입니다. 이러한 아담의 후손에 대하여 한번 정리하고 노아를 통하여 새로운 일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됨을 알린 것이 족보입니다.

3)창세기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의 족보의 정리의 의미란? 인류는 홍수 심판으로 인하여 종결이 되고 노아의 자녀들에 의하여 새로운 인류가 번성이 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4)창세기 10: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노아자녀들의 족보의 정리의 의미란? 새로운 인류가 형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부패한 모습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부패하는 보습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5)창세기 11:10,27 샘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샘의 후예와 데라의 후예 족보의 정리의 의미란?

심판이후에 하나님은 셈의 가계를 선택함을 부여 준다. 그리고 데라의 가계를 선택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하나님의 구원이 이제 민족을 이루고 구속의 원리의 신앙을 가지는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6) 창세기 25: 12,19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이스마엘의 후예, 이삭의 후예들의 두 족보의 정리의 의미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의 족보를 따로 기록함으로서 이스마엘에게 이 유업을 제외시키고 이삭에게 이 유업을 이어 받게 한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의 원리가 이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구원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7)창세기 36: 1, 37:2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에돔과 야곱의 족보의 정리의 의미란?

이삭의 아들 에서가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에서 제외되고 야곱이 유업을 이어 받는 것입니다. 야곱을 중심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이 된 것을 정리하여 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의 가인의 족보의 성격

1.추방당하였던 가인이 생명과 가정을 얻는다.

이 족보는 라멕의 세 아들들-야발 유발 두발가인.(아마도. 이 이름들은 모두 다 생산을 뜻하는 야발로부터 유래한 듯하다. 이들의 직업은 예술적이다. 예술은 유목과 병행하여 있는 음악과 금속세공입니다.

흥미롭게도 나아마 ( ‘즐거운사랑스러운’ )라는 딸에 대해서 언급 한다. 이 네이름들은 생명을 경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창세기 6장 결혼과 타락, 노아의 역사는 홍수의 예비

노아의 홍수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들 중의 하나입니다.

노아의 이야기가 홍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 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 자신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6:5~8로부터 8 : 20~22(J)

6 : 11~13부터 9 : 1~17(P)

심판으로부터 보증으로

파괴적인분노로부터 약속의 활로

소송언어로부터 구원의 언어로

 

노아의 홍수이야기를 말할 때에는 이처럼 경이로운 하나님의 돌이킴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심판에서 구원의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변화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 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8 : 1).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기억하셨다(개역은 권념하다로 번역함- 역지주).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것이다(105 : 5, 1: 54 - 55 참조). 이 권념하다는 단어는 기억하신것은 하나님은 인간사의 흐름에 무관심하거나 초연한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불평 중에 끊임없이 문제 삼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잊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10 : 11, 13 : 1, 42 : 9, 49: 14, 5 : 20 참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잊혀진다는 것은 목회적인 차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쟁점에 속한 단어 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으로 잊혀지는 어두운 밤의 때를 알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홍수가 넘침으로써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잊으신 것

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복음은 그가 기억하신다는 데에 있습니다.

 

죽음과 혼돈의 물이 사망으로 꿰뚫지 못하는 유일한 것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계약상대자와 관계를 맺으시는 은총의 행동입니다. 애정 과 자비에 기초한 행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일에 분주하신 분이 아니 라 계약상대자인 피조물에게 한없는 관심을 베푸시는 분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심이야말로 피조물에게 희망을 주고 새로운 삶 을 가능하게 한 단어입니다(삼상 1: 11, 19, 16: 28, 8: 4, 10: 12, 74: 1- 3, 15: 15 참조). 무엇보다도 욥 14: 13은 하나님의 기억하심이 죽음의 영역에서 희망의 마지막 근거가 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용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탄원합니다.

 

!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이말은 우리는 잊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 와 미래를 넘어서서 영원토록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The Eterna1 Now, 1963, p. 25). 홍수는 아무런 기 억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노아 홍수는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뜻과 불일치를 다루시는 사건입니다.

아담의 부르심과 셋의 후손들을 부르심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희망의 미래를 거부하였습니다

마치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같이 너희가 정녕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3:20)

피조물의 경우도 이스라엘과 동일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생긴 그러한 본질적인 균열은 홍 수이야기의 전제요 중심 주제입니다. 이 홍수의 이야기는 창조된 인간과 피조물이 하나님과 균열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 대가가 어떠한가를 보여 주며 아울러 하나님과 새로 창조된 세계 사이에 있을 미래가 어떠한지를 보여 준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의 배경을 이루는 새로 운 존재입니다(고후 5 : 17). 노아는 자신의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충분한 응답적인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여자의 후손이 점차 가인의 후손 즉 자신을 의지하여 지신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가인의 후손들과 교제하며 함께 살아가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고 가인의 세운 인간의 힘의 지배논리로 세상은 빠져 들게 됩니다.

여자의 후손이 가인의 후손들과 교제를 하고 함께 혼합하여 서로 결혼하고 살아감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볼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지고 인간의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자 하나님은 인류와 호흡하고 있는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셋 계열의 자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 계열의 자손들이 이제 사로 사랑하고 결혼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결혼을 통하여 악이 크게 관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사람의 딸들도 다 범죄와 하나님의 배신으로써 자신들이 영에서 성령이 떠난 육체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그러진 길로 감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그들에게 거두시고 그들이 멸망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시는 유기사상이 창세기 6장에서 시작이 됩니다. [로마서 유기사상 참고]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시는 이유는

창세기 6:5절 그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인간에게 성령을 거두시는 이유인 하나님의 한탄하고 마음에 근시하시는 이유는 ?

하나님의 사람 여자의 후손들이 구속의 원리를 버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실행 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의존의 행위를 포기하고 세상의 여자들과 결혼을 함으로서 사람이 본래부터 타락으로 생겨 먹은 꼴인 악함과, 사람의 마음에는 속속히 부패함과 포악함, 그대로 이 땅에 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인 노아의 구원이란?

노아는 약속의 후손이 오셔서 죄의 권세를 꺽고, 인간을 죄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만드신 여인의 후손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이 세상에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다시 이 땅에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실행 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의존의 행위로 세상을 통치하여야 할 것을 각성하였고 그런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이렇게 믿음을 오실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의인이다는 것은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자를 의인라고 합니다. 이점에서 에녹과 비슷합니다. 에녹도 의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자를 의인라고 합니다.

 

노아의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깨뜨리지 않고 계속 역사 속에서 성취해 나가시는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맺은 자기의 백성들에게 지정한 생명을 주시고 구원의 증표를 보여주시는 것이 노아의 언약입니다.

 

세 번째는 노아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 ......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생명의 약속으로 간주하고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심판을 받는 옛 인간성의 한가운데에 새로운 인간성이 출현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6 : 22).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7 : 5)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 (7 : 9).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생명의 약속으로 간주한다(12: 50 참조) 그는 성경의 이야기들 속에서 아직 나타난 적이 없던 신앙의 모델입니다. 세상의 심판으로 임박한 죽음이 선포되는 순간에 새로운 신앙의 사람이 처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심판을 받는 옛 인간성의 한가운데에 새로운 인간성이 출현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창세기 7-8

노아 홍수의 역사와 노아의 제사

구약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역사 속에서 발생되었기 때문에 구약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드러내시는 계시의 방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을 모든 사건 속에 펼쳐 놓으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미리 보여주는 그 어떤 하나님의 심판의 예표라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발생된 사건으로 나타나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세상을 신판하시는데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노아의 가족을 멸망하지 아니하고 구원하는데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는 노아와 언약을 맺은데 나타납니다.

 

홍수의 심판이란?

홍수는 미리 보여주는 그 어떤 하나님의 심판의 예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물든 세상을 완전한 공의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홍수의 심판이 이세상의 최종의 심판을 예표라는 것입니다. 최종의 심판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패된 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키시고 노아와 그의 가족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드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이 사악한 현재의 세상을 불로 멸망시키시고 새 하늘과 새땅을 창조할 것입니다. ” 여기에 대한 예표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홍수의 심판은 현제의 심판인 동시에 최후심판의 예표로서 보는 것입니다.

 

현제의 심판

6:11-12때에 온 땅이 하나님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 함이었더라

인류의 부패는 온 땅을 덮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된 땅에 사악함으로 채워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철저하게 부패의 길로 가 벼렸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활의 방식은 악독하고 사악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판단하였습니다.

 

이제는 인간 안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 죄의 세력에 의해 이미 부패되고 망쳐진 온 땅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자연의 세계도 인간의 죄로 오염이 되어버렸습니다. 온 땅도 엉겅퀴를 내는 것입니다. 동물들도 인간과 적대 관계가 되어서 인간에게 해를 끼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뒤틀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전개하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땅을 새롭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예표

홍수의 심판이 땅에 임하시기 7일 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그 방주로 들어갈 것을 명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기 전에 종말이라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때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자기의 백성을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7일전에 노아에게 베풀었던 은혜가 종말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홍수심판 7일전에 노아의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은 노아와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노아와 맺은 언약은 여인의 후손을 통해 전개 될 그분의 구원계획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의 중보자인 노아에게 은혜를 배푸신 것입니다.

716절에 하나님의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고 행하십니다.“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을 이루실 때까지 노아의 가족에게 계획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이러한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는 은혜와 심판은 구원의 완성 때까지 구원역사 전 과정을 통하여 계속 나타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9

노아의 저주와 축복

하나님은 노아를 새 인류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아담에게 주셨던 이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문화적인 사명을 다시 수여 하십니다. 9:1절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노아는 옛 역사를 씻어 버리고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이 세상의 통치이념으로 나타나는 거룩한 나라를 건설하여야 하였습니다.

이러한 노아가 사명을 수행함으로 하나님의 보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무지개의 언약으로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6:18절에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여기서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어서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홍수 이후에 노아와 다시 언약을 맺는다는 것인지?

하나님의 언약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언약의 관계를 수립할 때 미리 언약의 관계를 예견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구원의 역사속에 종종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시기 전에 노아와 그의 가족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을 노아언약을 미리 예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 후에 노아와 언약을 맺으실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하나님은 누구와 언약을 맺습니까?

9: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9: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노아의 가족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과 땅까지 포함을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은 인간이 아닌 생물들도 하나님의 구원과 언약에 포함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영혼구원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 받는 자의 삶의 모든 환경까지 포함을 하는 구원임을 강하게 시사를 하고 있습니다.

 

2]언약의 내용은?

홍수와 같은 보편적인 심판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보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노아와 맺은 언약을 보존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로서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노아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의와 사랑으로 이땅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은 언약을 맺습니다.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이 구원은 인간의 삶을 전체를 포함하는 문화적인 영역까지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91-7절에 하나님의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는 열심히 나타납니다.

또한 인간에게 다스 새로운 다스림을 위임을 받게 한 것입니다.

다스림의 권한을 받은 바 있던 인간은 이제 새로운 다스림을 위임받는다(9 : 1- 7).

아담은 창세기 1: 26에서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물고기와 새와 짐승 을 다스려야만 했습니다. 이는 다른 피조물을 번성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존재로서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되그 피조물들을 더 나아지게 만들고 피조물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미하며 그 권위를 높여 주는 방식으로 다스려야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인간을 궁극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로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하신다(6 : 32 참조).

: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12: 7).

3]언약의 증표는 ? 무지게 언약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습니다. [9;13]

언약의 증표란 ?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증이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구원자의 보호자로 헌신하였음을 인간에게 상기 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 스스로가 구원에 대한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9: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하나님은 시작을 하시고 보증을 하시고 자기의 백성의 구원을 위한 일을 성취하십니다.

이러한 것을 이해하도록 역사적인 구조로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무지개언약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후손에게 화를 내리시는 것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우리를 구원하는 두 가지의 성격을 지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시는 멸망치 않겠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무지개 표지가 주어진 다(12- 16). 무지게의 표시는 활이다. 활은 다시는 하나님의 자신의 무기 활을 인간에게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무지게의 활(bow)은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 존중하져야 할 맹세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기 하다(9 : 16). 멘댄홀(George Mendenhall)은 그것을 무기로서의 활로 볼 뿐만 아니라 꺼내어지지 않는 활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주께서 이들을 멸하려는 거룩한 혼돈에 대하여그리고 아마도 벌하려는 자신의 거룩한 성향에 대하여 다시 거룩한 구원의 승리를 거두셨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The Tenth Generation, 1973, pp. 38 - 48). 하나님은 더 이상 자신의 영광에 도전하는 세상적인 적을 쫓아다니지 않으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가 다시는 자신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조물이 아무리 도발적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사용이 중단된 활은 이로써 창 2 : 1~4a에 있는 안식일과 평행을 이룬 것입니다.

노아 언약으로 세상의 재창조(8 : 20 - 9 : 17)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기를 거두시는 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노아의 언약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은 항상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 [20-27]

야벳과 셈에 대하여 축복을 하고 가나안[]에 대하여 저주를 합니다.

 

 

창세기 10

노아의 아들의 역사: 민족들의 계보 언어의 혼잡, 셈 데라의 역사

 

창세기 10: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노아자녀들의 족보의 정리의 의미란? 새로운 인류가 형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부패한 모습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 언어의 혼잡= 바벨탑사건

바벨탑사건은 노아의 홍수의 사건이 일어나고 100년이 지날 즈음에 동방으로 이주하다가 시날 땅에서 한 평야를 발견하고 거기에 인간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후손은 동방으로 이주하다가 시날평지에서 탑과 성을 쌓기로 결정을 합니다. 성을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은 망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성을 보면 수원성 남원상성 등이 있습니다. 성은 국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에는 국가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한 성을 중심으로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바벨탑은 하나의 인간이 최초로 국가를 건설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를 이루는 이유는 자기 이름을 내고 하나님의 보화를 무시하고 자기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세우신 의와 사랑의 통치를 거역하고 노아 홍수이후 새로운 인류는 자기들의 독자적인 세계를 건설해 나간 결과 바벨탑을 쌓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의 독자적인나라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의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노아의 언약은 인류가 다시는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생존을 보호하고 관리하겠다는 하나님의 섭리로 때로는 무지게 언약으로 보장을 하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인간은 노아의 홍수 이후 100년동안 다시 타락으로 생존의 문제로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살수가 없는 죄악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탑을 쌓게 된 것입니다.

 

바벨탑이후에 사탄은 세상을 국가의 조직력과 우상으로 세상을 지배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의 나라를 세웠지만 불신앙의 사람들은 결국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생존의 위협과 스스로 보호를 위하여 자구책으로 바벨탑으로 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돌아갈 자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곳입니다. 노아의 언약인 무지게의 증표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약속하는 증표입니다.

 

노아의 새로운 후손들은 사탄의 통치 원리에 순종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일과 정반대로 인간의 나라를 건설하고 말았습니다.

홍수이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의 후손의 역사는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흩어지는 것을 면하는 것으로 사탄의 다스림으로 하나님을 반항함이 드러냅니다. [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반대하고 인간의 나라를 세움으로 노아의 언약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 결국에 하늘에까지 닿은 탑을 쌓아서 하나님께 도전을 함으로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창세기 10장에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하고 셈, 함 야벧의 후손이 각각 자기의 나라를 세웁니다.

 

인간은 완전히 썩은 상태입니다. 핵심까지 완전히 썩어서 인간은 평생 악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근본적으로 썩고 악하기에 하나님이 더 이상 보편적인 심판을 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부패한 마음과 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을 대적하다고 결국에는 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벨탑의 사건입니다.

 

창세기 11:10,27 샘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의 후예와 데라의 후예 족보의 정리의 의미란?

심판이후에 하나님은 셈의 가계를 선택함을 부여 준 것입니다. 그리고 데라의 가계를 선택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바벨탑사건으로 한 나라를 건설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무시하고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거절하고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였지만 가인의 불순종의 후손을 뒤로하고 하나님은 셈의 후손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열방으로 흩으셨다는 것입니다. 셈의 후손은 하나님이 보호를 믿음으로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제 믿음으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11:10,27 족보에서 보여주는 것은 두 개의 큰 대 사변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홍수와 인류가 하나님의 다스림의 나라에서 인간의 나라 여러 국가로 분리되는 사건을 통하여 인간의 생명은 단축이 되었다는 것을 족보가 보여 줍니다.

인간의 생명의 단축은 여러 나라로 분리됨으로 첫 번째 지구의 기후가 변화가 됩니다.

노아는 950세를 살았습니다. 노아는 옛 시대 홍수 이전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홍수이전에 태어나고 홍수 이후에 사는 셈은 600세 현제의 심판을 받는 습니다.

 

창세기 11:10,27 족보에서 보여주는 것은 생명의 단축이 된 것을 보여 줍니다.

노아는 960세까지 삽니다. 셀라는 433에 에벨은 464세 살았습니다. 그리고 벨렉의 시대에는 239세로 줄어 듭니다. 르우도 230세 스륵도 230세 나홀의 시대에는 148세 이상 살지 못합니다.

6:11-12때에 온 땅이 하나님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 함이었더라

 

이제는 인간 안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 죄의 세력에 의해 이미 부패되고 망쳐진 온 땅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자연의 세계도 인간의 죄로 오염이 되어버렸습니다. 온 땅도 엉겅퀴를 내는 것입니다. 동물들도 인간과 적대 관계가 되어서 인간에게 해를 끼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뒤틀렸습니다.

이제는 인간 안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 죄의 세력에 의해 이미 부패되고 망쳐진 온 땅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자연의 세계도 인간의 죄로 오염이 되어버렸습니다. 온 땅도 엉겅퀴를 내는 것입니다. 동물들도 인간과 적대 관계가 되어서 인간에게 해를 끼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뒤틀렸습니다. 자연의 변화가 생깁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의 습관의 변화입니다.

인류의 부패는 온 땅을 덮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된 땅에 사악함으로 채워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철저하게 부패의 길로 가 벼렸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활의 방식은 악독하고 사악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판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전개하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땅을 새롭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전개하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땅을 새롭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을 부르심

아브라함을 부르기 이전의 역사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후의 역사

 

아브라함을 부르심은 노아 홍수 후 약 300년 뒤에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바벨탑 사건 이후 약 200년이 지난 후 일어난 사건입니다. 노아 홍수이후에 인간은 자기자신을 보호하기위하여 바벨탑을 쌓으면서 나라를 만들고 또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우상에 빠지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인류가 생명이 단축이 되고 자신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은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우상숭배의 나라 갈대아 우루에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구조를 볼 때 아브라함을 부르기 이전의 역사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후의 역사 창세기 1- 11 : 3212 : 1 사이에 중요한 단절이 의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으로 이 단절은 구약과 창세기 안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상의 단절일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로 시작이 된 인류역사 끝과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으로 시작한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이야기입니다. 인류의 저주의 역사의 끝과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는 축복의 역사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역사 끝과 생명과 축복의 역사를 나눈 단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보호와 영광을 거절하고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것과 자기 자신들이 자기 자신을 보호함으로 생긴 우상숭배로 끝을 맺습니다. 12 : 1 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새로운 구원의 역사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이스라엘민족을 부르심으로 시작을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시작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시작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부르심(12 : 1-3)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창세기 1- 11장에서 창조의 역사로 시작인 된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에 의해 생겨나고 말씀에 의존하는 창조의 언어로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창12 :1절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말씀의 권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되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의 역사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난후의 역사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1: 30~ 3212 : 1~9을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은 무에서 말씀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말씀의의 의존적이고 말씀과 유기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나 창12 :1절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자녀를 부르시는 구원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기 이전의 역사 (1~11장 요약)

1]두 개의 창조이야기: 홍수이전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이야기 1 : 1- 2 : 24)와 홍수이후 인류를 멸망하고 다시 재 창조이야기입니다. (9 : 1- 17)

홍수이전 창조의 세계는 아름다워야 하고 또 하나님께 순종것입니다. 하나님은 세계가 혼란스럽거나 분열되어 있거나 갈등 속에 있도록 부르시지 않습니다. (이사야45: 18 - 19)

아름다움이란? 하나님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말씀에 의존된 상호관계는 말합니다. 천지 창조의 질서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에 의해서 발생한 의존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창세기 l장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신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순종으로 응답해야 한다. 창조의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함으로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천지 창조는 단순히거기에있게끔 어떤 물건을 만드시는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에 하나님은 어떻게든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불러냄으로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피조물은 말씀에 의하여 불러냄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말씀은 인내와 긍휼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지 창조때의 피조물은 목수가 만드는 어떤 물건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피조물 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소명. 그의 가나안에로의 이거와 애굽으로의 여행 (1213)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부르실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세계상황에 대해서 말한다(12 : 1- 3). 당시의 세계는 아직 해결을 보지 못한 근본적인 문제들로 기득 차있었습니다. 창세기1~11장의 해결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찬양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요한계시록11장의 대 환상에로 설명을 합니다.

계시록11장에서 세상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15). 듣지 못하던 자들 이 이제는 듣는 자들로 변하여(2: 11) 하나님을 찬양 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11 : 16 - 18)

2]두 개의 불순종이야기: 홍수이전 불순종이야기(6 : 1- 4)와 홍수이후 불순종이야기(9: 18 28) 홍수 이전의 불순종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이 항상 악하고 계획하는 것이 악하여 죄가 세상에 돌이 킬 수 없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홍수 이후의 불순종의 이야기는 새로운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아니하고 자기자신을 보호할 나라와 생명이 단축이 됨으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3]두 개의 족보: 홍수이전족보 (5)과 홍수이후 족보(10 : 1 - 32, 11:10 - 29)

4] 죄와 심판에 관한 두 개의 심판: 홍수이전(3 - 4)과 홍수이후(11 : 1- 9)

 

아브라함의 부르심

12:1-3 11장 바벨탑 사건

지시할 땅 시날평지

2. 큰 민족을 이룰 것, 가나안 땅이 그들 소유가 될 것 큰 성과 대

3 하나님이름을 창대케함이다. 자기 이름을 드러냄

4. 그들이 모든 백성에게 대하여 축복이 되리라. 저주를 받음

 

바벨탑 사건이후에 하나님의 새역사가 시작이 된다.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시작된 나라는 축복의 나라이다. -건축자가 하나님

바벨탑으로 시작된 나라는 저주의 나라이다. -건축자가 인간

망하고 저주의 나라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이 아브라함과의 약속이다.

 

이 아브라함과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이해의 폭이 넓혀져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까지 연결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의 역사의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까지 연결되어 설명을 한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의 역사의 의미를 세 가지로 요약을 한다.

1:17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 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아브라함-다윗= 구약에서의 하나님나라의 왕국의 형성,

다윗- 바벨론=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나라왕국의 와해

바벨론- 예수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왕국의 재건= 하나님 나라의 왕국의 소망

 

11

1. 선택된 가족이 큰 민족을 이루실 것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사탄적인 성격이 강하고 우상적인성격이 강합니다. 사탄을 섬기고 사탄의 비호아래 먹고 사는 방편으로 유지된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사탄의 나라에서 부르심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심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탄의 통치가 유지되는 일반 국가와 사회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바탕으로 다스리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의 지배아래 건설된 나라들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나라입니다.

죄로부터 세상으로 구별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유지되고 다스려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의 성격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12 : 1).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면서 동시에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부르심이면서 동시에 보증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잉태치 못한 자에게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부르심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자격이 없는 자의 부르심이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아브라함 가정을 향하여 희망의 미래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임상황에 부르심 것입니다. ‘불임은 이스라엘의 현저한 무기력증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저주인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이 자식을 낳음으로 믿음으로 이어지는데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구원에 대한 저쥐고 심판입니다. 그러나 여인의 후손을 이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로 불임이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망의 절망적인 사람들 안에서 구원의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자유와 권능을 의미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은 특히 자격 없는 자들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은 아브라함의 모델을 따르는 예수께서 자격 없는 국외자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부르시는 분임을 암시한 것입니다.

a. 마리아의 부르심은 마리아의 찬가(1: 46-55)는 하나님께서 특히 자격 없는 자들비천한 계집종을 돌아 보심이라’ (48)= 비쳔하게 버려지는 자를 돌보심의 부르심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부르심 (52)비쳔하게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은 비천한자를 높이 시기위하여 부르심 이라는 것과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부르기 위하여 부르심(53)= 탕자처럼 썩어질 것을 먹으며 되지 쥐엄열매를 먹으며 이세상의 사망의 철학으로 먹고마실 사람들에게 좋은 것으로 배부르기 위하여 부르심등 마이라는 자신의 운명의 전환에 관하여 노래한 것입니다. 일상적인 차원을 넘어 서는 하나님의 복주시기 위한 부르심은 혁명적인 진술이 아브라함의 부르심입니다.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 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55)로 끝난 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b. 누가복음 13 : 1O~17에 보면 아브라함 전승은 질병을 앓던 한여인의 이야기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 그 여인은 18년간 사탄에게 매임으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배척을 당했습니다. 18년 동안이나 그녀는 사망의 저주에 매인 삶을 살았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이 이름없는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칭 하신다(16).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망으로 이름도 없이 18년간 사탄에게 매인 여자라는 이름을 하는 여인을 부르신다. 아브라함의 딸로 부르신 것입니다.

 

C.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부르심= 누가복음 16 : 19~31의 비유는 명백하게 복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날마다 자색옷을 입고 호와 호식을 하는 부자 와 복의 표지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부자집에서 개들이 먹는 음식을 먹는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부자는 지옥을 가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앉은 것을 비교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저주 아래 살던 자에게 하나님이 불러서 다시금 복이 주어지고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소속되어 불려가는 자는 날마다 자색옷을 입고 호와 호식을 하는 부자가 아니라 그 가난한 거지라는 것입니다(22) .

 

d. 삭개오 부르심에 관한 널리 알려진 이야기(19: 1- 10)에 보면 삭개오라 는 세리장은 분명하게도 멸시받는 국외자국적을 가진 이방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구원 을 선포하시고철저하게 멸시받은 그가 참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고 주장하신다(9).

 

 

일을 중단한 채로 삶과 희망을 포기한 자들하나님의 저주로 약속의 자녀가 끝기고 잉태치 못한 냉냉한 자들에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무기력한 자들을 미래를 가진 공동체 아브라함의 가족 안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18년간 걸을수가 없는 앉은뱅이를 그는 움직일 줄 모르는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순례길을 겉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두 번째의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포기와 떠남의 부르심이다.

4절에 나타난다. 4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기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좇아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갔던 것입니다(4).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는 순종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어도 약속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비록본문에는 이 낱말이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본문은 여기서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약속을 믿은 한 가정을 만드셨음을 보여 주 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말씀을 쫓아갔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린 채로 따르는 모든 제자들의 원형에 속한다(10 : 28).

 

그 명령은 간결하고 단호하여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눈을 감고 떠나라 ...... 너희 나라를 포기할 때까지 너희 자신을 온전히 내게 맡기라." (칼빈)고 말한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그때는 사람들이 흉악하여서 나라를 만들어서 자기의 재신과 생명을 보호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씨족을 떠나는 것은 생명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바벨탑의 문화는 자기탐닉을 추구하는 바벨탑의 문화 속에서는 네 삶 은 너 자신에게 맡겨져 있다"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어렵다.

바벨탑의 안전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불임을 지속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불신앙의 상태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아담이 범죄하고 사탄의 머리를 여인의 후손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떠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떠나는 것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희망을 갖는 것 입니다.

 

포기와 약속을 향한 떠남, 이 두게의 주제는 구원의 상당 부분을 지배적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직의 전승과 예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도 반영되어 있다(1: 16 - 20. 10: 28).

떠나는 자에게 약속이 있다.

그 약속은 다섯 개의 1인칭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2 - 3a) :

(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2) 내가 네게 복을 주어

(3)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4)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는 내가 복을 내리고

(5)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여기서 아브라함을 주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다. 내가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계속 강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받아들여야 할 미래는 이스라엘 자신의 성취나 업적에 달려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7: 11).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스라엘은 고통스러운 결단에 직면케 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인 것입니다.. 그 약속은 결단과 급진적인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모든교만을 물리칠 것을 요구하며세계가 신뢰와 찬미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운행되며 그 하나님에 의해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항상 동일하며자신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을 열망하면서도 그것이 이루어질 하님이 이루실때 까지 기다려야한다는 것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그 약속은 일종의 위탁처럼 보이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3b). 이스라엘의 행복은 다른 민족들의 행복을 위한 가능성을 부여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다른 이들과 함께이방인들을 위하여이방인들 중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잉태치 못한 자들이 이제는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자로 명령받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세계 안에 있는 교회의 사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암시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생명이 다른 민족들도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게끔 그들의 갈 길을 자극하고 또 그들 가운데 살명서 그들에게 본을 보여야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 번째 아브라함의 부르심의 성격은 사망에서 부활 생명의 참여로서의 부르심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부르심, 사망참여에서 부활의 참여로의 부르심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에 관해 말하면서 이러한 부활 개념을 언급한 것입니다 :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4: 17

 

 

셈의 자녀들이 창 11:9

창세기 128

벧엘 동쪽 아이라는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 이름을 불렀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 이름을 부르시는 의미란?

가나안 사람들에게 있어서조차 제단을 세우는 일은 자기가 약속을 주신 분을 신뢰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주신 분께 매달리기로 결심했음을 의미한 것입니다.

여호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삶의 유일한 주관자에게 자기의 삶의 방향을 돌이킨다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에서 찾아온 기근의 의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땅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간곳인 가나안땅이 기근이 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근이 듭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는데 그 장소가 축복이 아니라 기근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기근을 접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태도에 대하여 소개하고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에서 기근을 주시는 목적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2 :1O~2012 : 1~9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소개합니다.

창세기 12 : 1~9에서 아브라함을 소개할 때는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으로 묘사를 합니다.

12 : 1~9에서 아브라함은 완전한 신앙적인 사람으로 묘사 합니다. 그는 부름을 받고서 순종하여 떠난 믿음의 사람으로 묘사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갑작스럽게 바꾸신 하나님의 이름(12 : 8)과 하나님의 말씀(12: 1- 4a)만을 의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완전하게 받아들여진 믿음의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히브리서 11장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신앙의 모범으로 소개된 것입니다.

 

그러나 창12 :1O~20은 아브라함을 염려하는 사람불신앙의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관심이 없고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는 데 관심이 많은 불신에 사람으로 소개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약속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 루터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두고서 기근으로 말씀이 아브라함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했다"고 예리하게 논평을 하였습니다.

 

가나안땅에 갔는데 불신앙의 유혹이 아브라함이 신앙을 위한 최선의 결단을 내린 직후에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사람과 불신앙의 사람으로 소개를 합니다.

마가복음 8: 27-33의 내용이 창세기 121-20절의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8: 27-30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으로 그의 위대한 신앙으로 인해 칭찬을 듣습니다. 그러다가 31-34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믿음으로 보고 십자가에 죽어야 할 비밀을 비로소 말씀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구속주로 십자가에 죽음을 반대를 합니다. 베드로는 즉각적으로 신앙의 부족으로 인하여 책망을 듣게 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불신앙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왜 이렇게 믿음의 시작과 불신앙이 교차 할까?

이는 문서 비평적인 본문구조를 자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위하여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행복을 포기합니다.

갈대아 우리에 있었더라면 아브라함은 적어도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갈대아 우르에는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생을 살아가는 데는 큰 불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메소포타니아의 모든 행복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하란을 떠나 간 곳 가나안땅이 기근이 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순간부터 기근으로 고생을 하여야 합니다.

왜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순간부터 사탄이 제공하는 삶의 방식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장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견인의 생존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나안땅이 기근이 들었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기근은 인간이 노력하면 살아 갈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10절에 가나안의 기근으로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은 삼각주로서 나일간의 범람으로 아주 비옥한 땅입니다. 양식이 풍부한 땅입니다.

지금까지의 해석은 아브라함이 사탄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가야 하는데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았는데 양식이 풍부한 땅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탐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한 즉시 그는 약속의 땅 이 기근의 땅임을 발견 하게 됩니다. 기근의 위협은 아브라함에게 애굽의 제국적인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무자비한 제국과 아무런 자원도 가지고 있지 못한 아브라함 사이에 거래관계를 설명을 합니다.

애굽은 압도적이고 무자비한 제국의 힘 앞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용기와 정체성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 애 쓰는데 힘이 없어 죽음의 위협앞에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힘없는 공동체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시기 않는다면 여자의 후손들은 영원히 죄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왜요 기근으로 아브라함이 죽게 되면 아브라함의 자녀인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순간부터 사탄으로 제공되는 삶의 방식을 거부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나안의 기근은 사탄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하고 아브라함과 뱀의 후손들과 싸울 영적인 전쟁이 전개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브라함이 가나안땅 기근으로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보고 반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라를 취하려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때문에 애굽에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 하지 아니하고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사라가 누이라고 속입니다.

이 이야기가 아내를 누이로 입양함으로써 그녀에게 보다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주고자 했던 호리 족속의 옛 관습을 반영한다고 슈파이저가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서 억지해석이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신중하면서도 정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하는데자신을 애굽왕의 죽음의 위협 건지기 위해 아내 사라를 위기에 빠뜨리기까지 한 것입니다.

 

애굽의 왕 바로는 자기 나라에 그토록 많은 여인들이 있는데도 사라만을 요구합니다!

이로 인하여 아내 사라를 애굽의 왕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애굽의 왕에게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호하고 지킵니다. 그리고 바로왕의 탐심으로 애굽에 재앙을 내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보호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이 보호로 애굽왕에게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합니다. 애굽의 왕 바로가 어떻게 하여 자기에게 닥친 재앙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8-19)

 

왜 애굽의 왕과 애굽에게 재앙이 내릴까?

아브라함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는 말씀을 들은 바가 있고 이것을 믿었습니다. 사라를 애굽의 왕에게서 보호한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참으로 약속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줄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또한 다른 사람들 을 저주할 힘도 가지고 있다(12 : 3), 이 이야기의 기이한 결론은 아브라함의 야비한 행동이 애굽왕에게 저주를 초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저주는 (우리의 도덕적인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아브라함에게 임하지 않고 죄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아브라함과 관계하는 것이 위험스러운 일임을 알게 되는데아브라함도 그 점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자신이나 애굽 제국보다도 훨씬 힘있는 어떤 하나님의 보호의 권능인 어떤 것이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신실하지 못하게 행동할 때에 세상 속으로 저주가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이나 그들의 신실치 못함은 그들 자신에게만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민족들 모두에게 문제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기이한 방식으로 다른 민족들의 삶에 영향을 줄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의 관심은 하나님이 사라를 보호하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구원을 이루심에 관심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예수그리스도를 낳게 하기 위하여 사라를 애굽의 왕에게서 보호해주심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라도 아브라함과 함께 약속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에게서 사라를 보호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 자체에 대하여 신실하게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과연 약속을 믿고 있는 것일까?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불신앙은 죽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17). 그러나 하나님은 불신앙에서도 구원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불신앙으로 구원의 약속이 위기에 빠뜨렸다 해도 그것은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구원의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과연 아브라함의 불신앙에도 자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인가? 분명히 그렇습니다. (고후 1: 19 - 20 참조). 하나님 의 은총은 충분히 확증된다.

 

이스라엘의 믿음은 그 첫 번째 시험에서 부터 불합격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과 이스라엘의 비열한 불성실함이 이방에게 축복과 저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능의 깊은 신비를 마주하게 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바로도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복과 저주의 힘을 막지 못한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유로운 방식으로 구원의 약속을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12:10-20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떠남의 의미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약속의 땅에 들어선 아브라함은 장차 이땅에 건설될 새로운 나라를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삶의 원리가 성취 될 것을 소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삶의 원리는 누구든지 열심히 살면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고 명예나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라본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세상과 같은 원리로 경영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나라이기에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뜻에 의하여 살지 않으면 안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인본주의를 철저하게 배격을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나라입니다. 인간의 이상을 철저하게 포기하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사탄의 지배를 거부하고 가나안땅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부딪친 사건은 기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당한 기근은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안하느냐? 중요한 시험 때입니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갈대아 우르는 기름진 곳이었기 때문에 기근으로 생존의 위협을 당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장차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곳 아브라함의 후손이 살아야 할 땅은 기근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땅 기근 문제는 인간의 생존의식주는 어디에서 공급을 받아야 하는 가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공급을 받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땅이 기근이 들면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나안땅에 기근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존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근이 있는 가나안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가 적용이 되지 않는 곳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이 기근이 임하였다는 것은 약속의 땅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살수 없는 곳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는 약속의 땅에서도 살지 못하고 쫓겨나는 일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기 때문에 적에게 빼앗기거나 잃어버리는 일도 없고 아무런 염려 없이 그곳에서 속히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자손들이 태어남으로써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온 목적을 순탄하게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나안땅을 주관하지 않으면 이 땅을 기업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기근으로 인하여 가나안땅을 떠납니다. 가나안땅에 다시 부르실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으로 내려오면서 아브라함이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나안땅에서 새로운 민족을 세우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서 새로운 민족이 태어날 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존제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경영할 하나님의 나라의 의도를 바르게 아는 것이 자기의 존제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애굽의 왕이 사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취하고자 할 때 아브라함은 그다지 큰 저항이 없이 사라를 바로에게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왕에 대한 절대의 복종과 암매한 여성의 가치관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나라의 왕은 일반의 백성을 소모품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여성을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고 권세를 상징하는 재산의 일부일 뿐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치관이 아브라함에게도 있었다.

12:17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이 내리신지라.”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이 있었다.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이 내리신 것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사라의 신분이 독특함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복의 근원임을 알게 된다. 아브라함을 복되게하는 자들은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해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복의 근원임을 알게 된다.

사라가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한 나라의 왕보다 더 귀한 존재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말살하는 인본주의 나라와 인간의 가치를 가장 아름답게 대우해 주고 있는 신분주의 나라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바로의 애굽의 왕이 하나님의 백성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3장의 롯과 아브라함 이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보호로 바로의 폭력 앞에서도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이 창세기 12장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3장에는 하나님의 보호와 행복에서 관심이 땅에 대한 관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머무를 충분한 땅이 있는가? 그 땅은 어떻게 하면 그 땅을 얻게 되고또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잃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내용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가나안땅의 귀환을 함으로 부자가 됩니다. 그 부함 때문에 땅은 협소하여 조카 롯과 갈등을 가지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똑같이 번성한 것입니다(30: 27 30 참조). 그들의 번성함이 계속되면서 이제는 보다 넓은 땅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물의 샘과 초지가 목축업을 하는데 부족하였습니다. 결국 이일로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두 목자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은 목자들 사이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형제관계에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음으로 서로 분리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욥은 요단들을 선택하였습니다. 요단들은 애굽처럼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땅이고 아름다운 땅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을 선택을 합니다.

롯은 장막을 옮겨서 소돔까지 이릅니다. 소돔은 악한 큰 죄인의 성입니다.

소돔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선택하는 것은 땅의 소유와 부유함의 소유하는 목적이 선하지 못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먼저 선택권을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선택권을 주시는 목적은 12 : 1O~ 20에서와는 달리 이제 자신의 삶에 관하여 걱정하지 않는다(12: 22 참조) 신앙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에 만족하는 신앙의 사람으로 묘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12 : 21) 자로서 행동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2 : 13~21에 보면 어떤 사람이 자기 몫으로 돌아올 유산이 적은 것 때문에 소송을 걸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이때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 찾아 와서 형의 제산을 나누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유산상속과 분배의 문제를 인간의 탐심에 관한 문제로 보고 인간의 탐심을 죽음에 이르는 길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설명을 합니다. 탐신 때문에 지옥에가는 한 부자의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복음 12 : 13~21에 있는 부자 (지옥에서 아브라함의 품을 갈망했던 부자는 누가복음 16: 19 - 31의 부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한없이 재산을 모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결론적인 말씀은 자신을 위해 쌓아 놓은 보물하나님을 향한 부요함을 대비시킨다(12 : 21). 22~31절에서 예수님는 자신을 위하여 쌓아 놓은 보물과 하나님의 좋은 선물들에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탐심을 물리치는 대안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탐심 (15)염려(2225)적은 믿음(28) 등을 서로 관련시키신 것(12 ’ 15 - 31)은 창세기 본문에 있는 아브라함과 롯 사이의 갈등과 같은 차원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롯과 해어짐으로 아브라함에게 확인 되는 것은 롯이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인 약속에서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카 롯이 떠나고 난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의 모든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며 또한 그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이 능히 셀 수 없을 정도로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반복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애굽에서의 신앙의 훈련으로 탐심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롯은 그러한 분쟁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이 이야기에서 수동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12 : 1O~ 20에서 기근을 피하여 애굽의 기름진 땅을 선택하여 이사하는 것과는 달리 이제 자신의 삶에 관하여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2: 22 참조).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에 만족하는 신앙의 사람으로 묘사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12 : 21) 자로서 행동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소명은 약속의 경제에 의존하여 사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땅의 약탈자부유의 구매자도둑 등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합당한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13장 복습

에노스와 기도

 

셋은 아들을 낳고 에노스라 부렀을까?

셋이 그의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로 지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셋이 에노스의 아들의 이름을 짓고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까?

"(13:4)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는 "순수한 인간인 아담"에 대립되는 인간의 개념을 지닌 것입니다: 에노스의 의미는 "고난과 질병의 절망적인 단계 그리고 전적으로 무력해진 상태의 인간"을 의미한 것입니다.

셋은 타락한 그 당시 인간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이 주신 힘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줄 모르고 단지 자기를 영화스럽게 하고 세상을 병들게 하며 파괴적인 데로 사용한 것을 보고 타락한 인간이 영적으로 매우 나약함과 악함을 간파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노스는 타락 전 아담 이하의 수준으로 떨어진 인간을 뜻한 단어입니다. 즉 에노스는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인간(아담)과는 대조되는 "비극적으로 존재로 된 인간"을 의미한다. 이 에노스라는 단어는 그 어원상(S.R Hirsch) 두 가지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도록 강요하는 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형벌" 또는 "벌금"을 의미한 단어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타락하여 악을 행하는 일에는 용감하고 힘이 있으며 또 이런 악행 때문에 형벌을 면치 못하는 존재로

 

존재로 된 인간"을 의미한다. 이 에노스라는 단어는 그 어원상(S.R Hirsch) 두 가지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도록 강요하는 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형벌" 또는 "벌금"을 의미한 단어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타락하여 악을 행하는 일에는 용감하고 힘이 있으며 또 이런 악행 때문에 형벌을 면치 못하는 존재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셋이 이렇게 인간을 약함과 악한인간으로 간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셋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타락한 인간 실존의 문제점을 파악할 줄 알았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이 인간의 악함과 나약함의 문제점을 보았다는 것은 그들 속에 생명이 있었음을 의미한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살아나 중생하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나아가 인간의 악함과 비참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셋이 시대적 죄악과 인간의 영적인 무능과 악함을 알았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거울로 인간의 악함을 간파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해 알고 그리고 사람에 대해 악함과 나약함을 바로 안다는 것은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성령을 통한 연합이 바로 重生입니다.

 

 

아내 사를 바로의 손에 빼앗길 뻔 했다가 하나님의 전권적인 개입으로 아내를 다시 얻게 된다.

이것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자기보다 권세가 높은 왕에게 거역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굽의 재앙과 바로왕의 가정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사라를 보호한다. 이서거을 통하여 세상의 권력을 가진 애굽의 왕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민족을 새우겠다는 약속이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롯이 아브라함에게 떠나는 이유

새로운 민족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에서 롯이 재외된 것이다. 롯이 떠난 다음에 다시 가나안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한다.

가나안땅의 주인은 아브라함이 될 것이다. 이러한 약속이다.

 

 

창세기 14장 이해

 

창세기 14장은 세 개의 단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a) 가나안땅의 주위에 나라들에 대한 국제적인 전쟁에 관한보고(1- 11) 이 국제적인 전쟁에서 조카 롯이 4나라의 동맹군의 포로로 잡혀 가게 된다.

(b) 롯을 구출하려는 아브라함의 개입(12 16). 아브라함은 318명의 종들과 연합군과 싸워 롯을 구출한다.

(c)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고 돌아 오는데 두 왕이 영접을 한다. 한 왕은 소돔왕이고 한왕은 살렘 왕 멜기세덱의 영접과 멜시세젝의 후속적인 축복의 만남 (17 - 24)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a) 가나안땅의 주위에 나라들 국제적인 전쟁 5개의 소 왕국과 싸움이 일어난 사건과

(b) 롯을 구출하려는 아브라함의 개임의 이미에 대하여 먼저 알아 봐야 합니다.

4개의 나라 연합국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작은 성을 쳐들어옵니다. 조 카롯이 이들에게 잡혀 갔다는 소식을 접한 아브라함은 종들 318인으로 구성된 군사로 조카 롯을 구하여 돌아옵니다.

이때 창세기 14;13절에서 아브라함이 단, 호바까지 조카 롯과 재물을 다 찾아옵니다.

 

아브라함의 종인 318명이 가나안땅의 주위에 나라들연합군을 이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 121-3절에서 약속하신 나라가 이루어지기 시작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강력한 세력인 연합군이 하나님의 나라의 세력앞에서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의 연합군대를 이긴 318명은너로 인하여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나라의 군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의 실재적인 주인은 하나님이 이미 약속의 땅으로 주어진 아브라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인 아브라함에게 대항하는 나라는 심판과 멸망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나라는 결국에는 심판으로 멸망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연합군을 이기는 것은 세상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앞에서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군사가 되어 싸우시는 나라이다.

 

12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아브라함은 애굽의 제국적인 힘앞에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를 합니다.

그러나 13장에도 역시 가나안땅에 들어 와서 가축떼와 물에 관한 위기가 발생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이 위기를 극복을 합니다.

14장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의 나라의 위기 앞에서 어떻게 승리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연합군과 승리를 거둔 후에 많은 재물과 사람들을 사로잡아 온다(16).

 

(c)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오는데 두 왕이 영접을 한다. (17 - 24)

아브라함이 침략군을 물리치고 돌아오자 17절에 아브라함을 맞이하는 사람이 두 명입니다.

소돔왕과 살렘왕 멜기세덱입니다.

소돔왕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사웨 골짜기까지 나아와 아브라함을 영접하였다.

소동왕이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사람만 돌려주고 빼앗는 전리품은 취하라고 하였다.

소돔왕아 알렘 왕 그돌라오맬과 그와 동맹한 왕들에게 빼앗긴 전리품을 고스란히 아브라함에게 돌리고 소유권이 아브라함에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독립된 하나의 국가인 하나님의 나라로 인정을 하는 것이다. 가나안의 지방은 알렘 왕 그돌라오맬의 속국으로 살고 있었는데 아브라함에 의하여 이 속국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소돔왕의 재안을 거절을 하고 전리품을 돌려준다. 아브라함은 노략 물을 가져가라고 권하는 소돔 왕의 청을 거절한다(23). 그 대신에 그는 자신의 확고한 신앙을 앞세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내가 너희들의 전리품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기를 싫어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님을 믿음으로 받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그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음을 밝히며 그 하나님께 손을 들어 맹세한다(22).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맞이하는 왕이 살렘왕 멜기세덱이다.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아브라함에게 주고 아브라함을 축복하게 된다.

멜기세덱의 축복에 대하여

 

멜기라는 말은 나의 왕이라는 뜻이다. 세덱은 의라는 뜻이다. 나의 왕은 이롭다는 뜻이다.

멜리세덱의 축복의 양식은 생명의 힘인 복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가 자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자력으로 존재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생명의 힘은 우리 바깥에 있으며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다음에 아브라함은 자가가 얻은 것중에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고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주는 것은 멜리세덱은 무든 믿는 자로 십의 일조를 받을 만한 신비한 왕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20)은 그것이 경건한 행동이 아니라 의례적인 의무에서 비롯된 행동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십일조는 낙헌제’ (free - will offering)가 아니라 하위직에 있는 자가 고위직에 있는 자에게 매여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예수그리스도에게 매여 있음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

첫째로 멜기세텍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상급자가 하급자를 축복하는 것이 관례인 까닭에 멜기세텍은 유일한 참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그는 당연히 아브라함보다 상급자이시다.)의 축복을 받게 된다. 시편 110:1-3절은 다윗은 멜기세덱을 메시아와 동일시하고 있다.

다윗은 멜리세덱을 통하여 주재라고 일컫는 성자 예수님을 발견하게 된다. 성부하나님이 성자 하나님께 모든 원수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성부로부터 권세를 받은 성자께서 모든 원수를 다스릴 것에 대하여 다윗은 노래한다.

 

둘째로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7: 3)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원형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82절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발견하고 즉시 달려 나가서 경배한다. 아브라함은 물을 가져다가 발을 싯기고 사라에게 떡을 장만하게 하고 하인들에게 송아지를 잡아 요리를 하게 하여 성자를 대접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직접 아들 이삭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을 듣게 된다. 이러한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멜기세덱을 통하여 메시야의 선지식을 먼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맞이하며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내용이 천지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라.”

 

멜리세덱의 축복기도의 의미에 대하여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축복의 내용은 하나님의 의하여 아브라함이 그리스도가 만들 새 나라를 건설할 민족의 조상으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새나라는 장차 그리스도에게 주어질 나라인데 이제 그 새로운 나라의 주인이 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 나라를 건설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복을 빌고 있다는 것이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멜시세덱의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죄로부터 구속하여 다스릴 새 나라를 아브라함을 통해 건설하게 하여 달라고 축복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가 그가 심판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다. (110:5)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침략한 그돌라오멜의 동맹군들을 쳐서 파하고 승전하여 도라 온 것은 장차 그리스도가 원수들을 파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가 원수를 물리치시고 승천하여 새 나라의 왕으로서 즉위 할 것을 예표하는 사건이다.

 

 

창세기 15장 아브라함의 언약

아브라함이 소수의 군대 318명을 이끌고 가나안땅의 막강한 군대 연합군 엘람왕 그돌라오멜을 좇아가서 롯을 구하여 온 사건은 하나님이 가나안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다는 명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는 것입니다. 연합군 엘람왕 그돌라오멜에게 승리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아 땅을 수호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의 실제적인 주인이 아브라함이라는 것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기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나안땅을 자기의 후손들에게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아브라함의 믿음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의지함]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을 받을 후손에 대한 안타까움과 누가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될 것이고 누가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에서 재외 될 것인가?

누가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될 것인가?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에서 재외 될 것인가? 조카 롯도 아니고 자기의 가정에서 기르는 에벤에셀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믿음의 자손이란? 어떻게 믿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인가? 어떻게 믿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믿음인가?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뭇 별처럼 많아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란? 자기의 부정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환경과 자기를 볼 때 고민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두 가지의 자기의 한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은 무자합니다.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씨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없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겠는가? 아브라함이 자손이 없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브라함에게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자기의 씨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것입니다. 자기의 환경과 자기를 바라 볼 때는 불신앙이 생기는 것입니다. 가지를 부정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자기의 환경이 두 가지의 문제인 무자함과 씨를 주시지 않는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어떻게 믿게 되는가?

 

믿음은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보다 더 깊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의 손에 나의 모든 인생을 맡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하는 자기의 부정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5장은 아브라함이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과정을 여기서 소개를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부정의 믿음을 어떻게 도출하여 왔을까?

 

창세기 15:1~6절에서 아브라함의 자기 부정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순탄하고 평화롭고 경건하게 받아들이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자함과 하나님이 씨를 주시지 않는 자기의 몸에 대한 영적인 전쟁과 인간의 갈등을 통하여 힘겹게 싸워서 하나님이 행하심에 대한 믿음으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갈등과 논쟁을 거쳐서 하나님의 선물로 얻게 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5:1~6절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 믿음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을 보여준 것입니다.

. (1) 하나님의 근본적인 약속

. (2- 3) 아브라함의 항변

. (4-5) 하나님의 응답

. (6) 아브라함의 믿음의 승인

 

. (1) 하나님의 근본적인 약속

아담과 하와의 창조의 언약의 결과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탄의 종으로 전략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 가운데 사망가운데 구속하시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 구속의 계획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그 증표로 삼고 아브라함과 새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인간들이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귀다툼하는 나라와 달리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다스려질 신령한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는 계획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새 나라는 아브라함의 자신을 통하여 생산된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건설 될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미래를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을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15:1절에서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상급은 받아 마땅한 상이 아니라왕이 자기의 종에게 명령을 할 때 왕의 명령에 위험을 무릅쓰고서 자신의 일을 수행한 신실한 종에게 주는 특별한 표창을 하는 것이 상급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상급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새로운 길로 들어섰는데 이 믿음의 길은 불임에 맞서 믿음으로 살도록 부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아브라함의 상급아리는 사실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서 믿음으로 살 것을 요청한 사건입니다(11:10 참조) 상급은 어려운 상황속에서 희망을 가진 자들이 믿음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만이 상급이라는 선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상급이란?

마태복음 5: 46에 의하면 믿음으로 소망을 가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불신앙으로 저항 하고 불신하면서 사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6: 1, 2, 5, 16은 사람이 주는 상급과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대조합니다. 사람이 주는 상은 외식으로서 자기가 자랑을 함으로서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2, 5, 16).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앞에서 믿음으로 행할 때 은밀하게 보히는 하나님이 갚으시리라~'(46, 17).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오로지 믿고 의지하고 영적인 전쟁에서 믿음과 신뢰 속에서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은 세 번에 걸쳐 인간이 주는 상과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대조하면서 강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상급을 바라보는 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소원을 가지고 자기의 후손을 낳을 것을 소망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는 것에 대하여 관심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온 인류에 구원을 줄 하나님의 나라를 이을 자가 되겠는가 누가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이는 상주 심을 바라봄이라(11:26절 참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인 자기의 자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 (2- 3) 아브라함의 항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강력한 반박(2-3)1절에 하나님의 약속과 나란히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두 가지의 항변을 내세운 것입니다

1]“나는 무자하오니

2]주께서 내 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2- 3).

아브라함의 가정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완전히 불기능하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진 것을 아브라함이 확인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무자함과 하나님이 씨를 주시지 않음으로 고통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그래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15:3절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 엘리에셀이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하나님이 후사를 주시지 않으면 그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에 대한 약속이 엘리에셀이 유업으로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 (4-5) 하나님의 응답

(4-5) 아브라함의 향변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은 15:4절에서 너 몸에서 날자가 그 일을 이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녀들이 태어 날 것이라고 약속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성취하시는 이는 하나님임을 말씀하십니다.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그 약속을 성취하시고 그 약속을 믿을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시는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는 새로운 깨달음만이 아브라함의 안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에 대한 미래를 보증한 것입니다 .

 

. (6) 아브라함의 승인

그 결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6)

아브람의 믿음의 기초는 불신앙의 삶 속에서 신앙이 어떻게 기능한 것일까?’

예수의 대답은 신앙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바요나 시몬아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 : 17),

아브라함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지식이나 설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받아들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만들어 지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항변(2 3)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설득으로 (4-5) 아브라함의 향변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마지막은 아브라함의 신앙 고백(6)으로 나아간 것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새로운 믿음의 순례여행은 사라의 늙은 몸에 기초한 것도 아니요아브라함의 나이에 지친 자신의 뼈에 기초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믿음은 세상의 불임을 뛰어넘을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믿음은 새로 운 삶을 위해 현재를 뛰어넘고자 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는 것을 뜻합니다.(16 :33 참조).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불신앙의 출발에서 믿기까지 하나님의 우리의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백부장(8: 10 - 13), 중풍병자의 친구들(9 : 2), 혈루증 앓는 여인(9: 22, 8: 48), 귀신들린 딸을 가진 여인(15 : 28), 죄인인 한 여자(7:5소경(18 : 42), 문둥병자들 (17 : 19) 등의 강한 믿음을 칭찬하신 것을 봐야합니다.

모두는 질병이나 불행으로 인하여 닫혀진 미래 즉 사망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그 닫혀진 상황을 기꺼이 포기하였으며 믿음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의 손에 나의 모든 인생을 맡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하는 자기의 부정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현제의 상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자하는 것과 하나님이 씨를 주시지 않는 것에 현제의 상황을 포기함으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소경과 중풍변자는 현상황을 포기하고 복음을 통하여 주어진 상급을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가진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상급의 선물이 주어졌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9 : 22, 8 : 48, 17 : 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7:5)

 

믿음으로 사는 것이란? 바울은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들 (22- 23)은 약속의 땅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인간공동체의 삶 속에서 약속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사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6)폰 라트는 이제 아브라함이 갑작스럽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되었음을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언약 체결(15:7-21)

아브라함은 내가 무엇으로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까? 확실한 표적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가르켜서 이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은 여호와라고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란? 전능하시는 하나님이 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시는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전능한 하나님 즉 여호와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성취해 가시는 과정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계시해 주신 거룩하신 성호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8절에 주 여호와여 내가 이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아리까?”

이때 아브라함이 깊이 잠이 들었는데 어두움이 임하고 심히 두려워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어떻게 전개 될 것인가? 출애굽의 사건은 예견하면서 하나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창세기 15: 13-16절의 내용입니다. 기다리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자만심에 사로잡혀 신속하게 우리 자 신의 미래를 만들려고 애쓰는 까닭에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내심이 부족하다 보면 약속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그것이 앞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바심(2- 3)은 그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결론

창세기 15장은 아브라함이 정말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정말로 신뢰하실 수 있는 분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믿음이야말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하며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 만든 것입니다. 불확실한 믿음은 약속의 지연을 이상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믿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창세기 16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 들어간지 10년이 되었습니다. 가나안땅의 왕들과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실제적인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 새나라가 하나님에 의하여 건설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새 나라의 백성이 누가 될 것인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다.” 15: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앞으로 하나님이 건설할 새 나라의 백성들을 생산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새 나라의 백성이 되어 신령한 나라에 참여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함으로 사래는 가나안에 들어 간지 10년 만에 애굽인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새 나라의 백성을 생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행동은 신학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행동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앞당기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칼빈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행동은 믿음에 결함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갈은 새나라의 여주인이 된다는 자부심이 하갈에게 생가는 것입니다.

하갈이 아브라함의 씨를 잉태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새 나라에서 하갈이 찾이 하는 위치 때문에 하갈은 주인 사라를 멸시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인들의 질투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의 질투를 어떻게 해석을 하여야 합니까? 누가 하나님께서 건설할 새 나라에 참여하고 여주인이 되느냐? 의 중대한 싸움입니다. 누구를 통하여 하나님이 새울 새나라가 건설이 되느냐? 이싸움입니다.

그러나 하갈의 실수는 아브라함의 씨를 잉태하는 것으로 사라의 위치와 역할까지 빼앗으려 한 것입니다.

 

여종이 멸시하는 것으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불평을 합니다. “내가 받은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이 사라의 종이였음을 상기시키고 사라의 마음대로 하갈에게 대할 것을 명합니다. 이 아브라함의 판단을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가?

아브라함의 판단은 사라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찾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애굽에서 확인하었기에 사라에게 하갈을 마음대로 하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하갈이 사라의 유업을 탈취하고 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 이것은 애굽인 하갈에게 허락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라는 자기의 종 하갈을 학대합니다. 그러나 하갈이 도망을 가게 됩니다. 하갈이 배속에 있는 이스마엘과 함께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는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가?

아브라함의 유업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갈은 사라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의 역사적인 소명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건설할 새나라에 백성을 낳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사명을 가지고 자기의 종이라도 주어서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명이 분명하였다는 것입니다.

하갈은 사라가 누릴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대신 누리려는 욕심을 가지되 되었습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사라가 누릴 영광만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은 인간이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으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갈이 이 모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포기하고 도망을 가는데 도망가는 길목 광야의 샘물 곁에서 여호와의 사가가 그녀를 만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 복종하도록 지시를 합니다. ‘

처음의 갈등(1- 6)은 출생을 통한 해결(15 - 16)과 대칭을 이룬 다. 처음의 갈등과 마지막의 출생 사이에 있는 중간부분(7-14)은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라와 하갈은 주인과 종관계임을 확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사라의 아들 이삭과 하갈의 아들 아스마엘 역시 주인과 종관계임을 확실하게 된 것입니다.

이 하갈에게 태어날 이스마엘에게 하나님은 복은 내리십니다.

이스마엘에게 약속의 땅 밖의 다른 곳에 거주 하리라는 복이요약속에 의존하지 않고서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 살게 되리라는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 밖에 있는 지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그 소년의 존 재는 약속안에 있는다들에게 결코 적은 유혹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4:21-31절에 종가 자유자의 관계임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이웃과 끊임 없이 불화한 상태에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갈이 하나님의 천사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와서 86세 되던해에 아들을 낳아 줍니다.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짖고 13년이 될 때까지 아브라함은 아스마엘을 약속의 자손으로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13년후에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엄청난 계획을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7:16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얻게 되는가의 해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라를 통하여 낳은 아들 이삭이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녀인데 아브라함의 유신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 자녀가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7

창세기 15,16장에서 누가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인가의 문제를 종결하게 됩니다.

15장에서 아브라함의 종인 엘리 에셀인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말씀을 잘 들은 종이 하나님의 나라에 상속자인가? 아닙니다.

16장에서 애굽의 사람인 사라의 여종인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나라에 상속자인가? 아닙니다.

씨를 주시지 않고 사라의 수경이 다 끊기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날 이삭이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는 사람들의 출산 방식으로 이땅에 태어난 사람들에 의 하여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들에 의해 그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21-31과 로마서 9장에서 이삭의 출생을 약속과 성령으로 출생하였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태어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육신으로나 혈통으로 낳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할례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저주를 받은 이세상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누가 될것인가? 할례를 받은 자들에 의하여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존재가 된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자손이 이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동시에 하나님께속해 있음을 선언하는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세례는 옛사람이 죽고 새 생명이 탄생함을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을 새사람 새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태어 났으면서도 이제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신분 새로운 생명의 능력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세례는 새로운 삶에 들어서는 것을 뜻하며 새 공동체에 안에 교회에게 새로운 충성을 의미한 것입니다.

 

할례는 마음의 할례를 강조합니다. 마음의 할례란? 이스라엘 안에 있는 진지하고 헌신적인 신앙을 대표한 표시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를 강조한다(26: 41, 10 : 16, 4: 4, 9: 26, 44 : 7). 마음의 할례란? 언약의 상대자(하나님)에게 기꺼이 충성하고 복종하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2: 29 참조).

 

또 그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한 바 되고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회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2: 11 - 13).

 

성례는 중생한 자에게 효력이 미칩니다.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차명햐는 것은 ᄒᆞ님의 자녀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누리기 위한 것입니닫.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진시한 잔치 자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성찬의 의미가 퇴색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이 분명하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기념하고 그 하나님의 나라의 복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기념하는 자리인데 죄의 문제로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라의 잔치를 회손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삭의 할례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하는 자로서 하나님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그래서 이삭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장성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이 무엇인지를 깨닳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생후 8일 만애 할례를 행하는 것은 구원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가 장성한 자로서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시인하고 받아들여서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도들이 비로소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고 있음을 실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르고 정당하게 살고 있음을 하나님앞에 내어 놓은 신앙의 표시로서 성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표시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17~18절에서 아브라함은 약속을 완전 히 의심하고 비웃으며 이미 얻은 아들에게 의지하고자 한다. 믿음의 조 상 아브라함은 여기서 다시금 불신앙의 사람으로곧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약속에 맞서는 대안에 기꺼이 의존하려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주실 상속자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비정상적인 방법을 쓰기는 했지만어쨌든 이미 아들을 얻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미래를 기꺼이 이스마엘에게 걸고자 한다.

(17 -18)은 하나님의 은밀하면서도 동요케 핸 약속을 피하려는 시도 를암시한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실패는 복음의 약속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던 제자들의 완악함과 비교가 된다. 마가복음 8 : 14~21에서 제자 들은 예수께서 5000(6: 30- 44)4000(8 : 1-10)을 먹이시 는 기적을 목격한다. 그러나 식사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자마자 그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생명을 주고 미래를 창 조하는 자원들이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거 의 포기상태에서 그들의 깨달음의 부족을 인정하신다(21) . 깨달음에 실패하는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그들은 완악한 마음으로 인하여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6 : 52).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제자들은 십자가의 소명이나 부활의 미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의 수난 예고(8 : 31, 9 : 31, 10 : 33 - 34)를 들은 그들은 저항하거나(8 : 32), 이해하지 못하거나(9 : 32), 앞날에 관하 여 입씨름을 벌인다(10 : 35 이해. 어느 경우에든 그들은 옛 것과는 무관 한 새로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예수 안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지못하고있다.

하나님의 권능은 약속의 자녀를 얻게 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육체의 이들에게 집착한다.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와는 달리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이해하지못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 : 24~31에서 약속의 자녀가 이스마엘을 대 신할 것이라는 주제를 사용한다. 비울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낸 자녀 들이 유업을 계승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창세기 18

여호와께서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의 장막을 방문하여 주심

할례의 의식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이 받아 들여 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의 장막을 방문하여 주십니다. (18:3-5)

여호와가 천사들과 방문하는 목적은 아브라함가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는 일이다. 이것은 18 : 1~15에서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그대로 이루어진다.

두 번째는 불의에 대한 것을 끝맺음을 내는 일입니다.

찬사들의 사역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서 상속자를 도와주시라는 것이요(18 : 1- 15),천사들은 구원하는 후사드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 성읍을 심판하고 파괴하라는 것이다(19 : 1- 28).

 

여호와께서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의 장막을 방문하여 주심 아브라함은 떡과 송아지를 잡아 대접을 합니다. 떡과 송아지를 대접하고 하나님이 이를 받아들이는 의미란?

천사과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청을 들어 떡과 송아지를 들어 아브라함이 드리는 제사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화목이 확인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의 장막을 방문하여 주신 것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1)사라로 하여금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새루운 백성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일입니다.

10-15절에서 사라가 비웃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설득을 한다.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라의 비웃음 사이에 믿음와 약속에 대한 긴장관계를 조성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며 약속을 불신한 사건입니다. 자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백성을 이루면서 확장되는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소망하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불신앙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앞에 서 있지만 그들답게 그 말씀이 이성과 믿음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성과 지식을 가지고는 믿음을 절대 넘어 설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특히 사라는 여기서 신앙의 모델로서가 아니라 불신앙의 모델로서 나타난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 하나님의 강력한 약속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들의 능력을 훨씬 능가 한다.

믿음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 준 것입니다. 믿음은 일상적인 삶과 인간들의 이해와 지각의 틀에 맞아들어 가는 합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약속은 다른 모든 것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관습적인 지혜 의 일부가 아아닙니다. 이 복음을 받이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인과 깨뜨려짐 과 세상의 방신에 대한 불연속성을 감수해야만 한 것입니다.

내가 이해하고 생각하는 세상의 방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불연속성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이 질문은 희망을 잃은 부부의 항변을 논박하고 기각한 사건입니다. 이선포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무너뜨린 성포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 인식에 대하여 가장 강력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나의 현실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현실앞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질문은 선포로 말씀을 합니다. 선포의 이유는 복음이 그들에게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

하나님의 결심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유효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 성경은 약속 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4 : 21 ; 21: 43 - 45 참조) 하는 자들의 증언이다. 우리가 준비되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을 확실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첫째하나님은 정말로 약속을 하여 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기 백성을 버리실 것인가?(32: 27)

둘째하나님은 약속을 하여놓고 우리가 자격이 없다고 자기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새로움에로 불임으로부터 희망에로 일으키실 수 있을까?(32: 17)

 

어떤사람이 영생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는 것입니다. 그가 돈을 사랑하여 떠났습니다.

이때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 바늘로 들어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느냐고 물을 때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신 말씀을 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10 : 27),

어떤 사람이 간질에 걸린 아들을 제자들에게 대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산에서 내려와서 이 병을 고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왜 우리는 고치지 못합니까? 이렇게 물어 보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하여도 옮길 것이요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 : 20),

 

우리는 믿음이 모든 것이 다 가능하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약속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만이 기능하다. 즉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부합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켓세마네 동산의 예수 자신에게 불행이 닥쳐옵니다. 거기서 그 역시 다음과 같이 기도하면서 창세기 18 : 14에 있는 물음을 던지신다. :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14 : 36),

오직 한 가지만을 빼놓고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 가능하다. 불가능한 그 한 가지는 그 잔을 옮기는 일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을(못할?) 일은 고통의 현실곧 십자가를 막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본문은 단순히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일시 적인 영웅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이루 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그 해답이다.

 

17:19절에서 약속은 이삭을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계승자로 인정하시어 친이 그와 언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의지입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는 목적은 18:17-19절에서 하나님의 도를 지켜서 의와 공의를 해하게 하려고 그를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완전하게 구현하는 나라를 건설하려는 것입니다.

 

 

2)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이 너무 심해서 하나님이 내려 오셔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삭이 낳을 것이라고 예고하고 난후에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다는 것은 약속의 자녀의 탄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건너편의 땅 가나안땅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소유입니다. 이땅을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시려는 약속의 땅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과 공의가 구현되어야 할 땅입니다. 이 땅에서는 불의 와 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서는 불의가 용납될 수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삭의 자녀들 이스라엘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을 항상 기억하여야 합니다.

불의 분량이 차면 소돔과 고모라가 거룩한 길로 돌아오라는 중재의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중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소식을 듣고 기도하게 됩니다.

중보자로서 하나님앞에 서게 됩니다. ‘

의인 50명이 있으면 멸망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결국 10명입니다. 의인 10사람만 있으면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의인의 열명의 수는 소돔이라는 사회에서 적어도 공의를 표시할 수 있는 최하 하안선입니다. 10명이 있어야 최소한의 유법이나 공의가 유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회에 불의한 세력에 대항하여 맛설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람을 말합니다.

 

어느 정도 썩었기에 중제자가 필요없이 하나님이 신판의 손을 댈 수밖에 없는가?

소돔과 고모라땅에 들어간 천사들에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특성을 볼수가 있습니다.

천사인지를 아브라함의 조카 롯만 알아 봤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조카 롯의 집에 천사들이 도착을 하자 남녀 노소 할 것이 없이 사망에서 모여들어서 어떻게 합니까? 19:5절에 우리가 그들과 상관하자? 이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상관한다는 것은 성적인 행위를 하자는 것입니다. 천사들을 자기들의 성적인 욕구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타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타락을 한다는 것입니다.

 

롯역시 천사들을 대신하여 자기의 두딸을 내어 놓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롯마져도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악의 영햐을 받과 있었다는 것입니다.

롯의 사위들 마져도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바든 다는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9장 멸망당한 소돔

 

창세기 19장의 내용은 이렇다.

 

1-3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사자들을 보냈을 때 그곳에 도착했을 때 문 곁에는 앉아 있는 롯은 이 천사들을 자기 집에서 유하여 가도록 강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을 롯의 청에 만류합니다. 그 이유는 거리에 가서 이들의 죄를 보면서 경악을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강청을 합니다. 천사들이 그 집에 들어갑니다.

 

소돔성 사람들(4-5)은 타락하여 천사들과 성 관계 가지려고 한 것을 볼 때 그 시대의 타락상을 볼 수 있다(1-11). 결국 사람들이 문을 깨려고 할 때 천사들이 문을 닫고 이들의 눈을 어둡게 하였고(11), 롯에게 천사들이 자기들이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망하라고 보낸 천사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롯에게 너희 딸과 사위를 대리고 이성을 나가라고 말을 합니다. 롯은 사위와 가족에게 소돔의 멸망에 대해 알렸으나, 사위들은 이 사실을 농담으로 여겼다(14). 동이트자 마자 천사는 롯을 재촉하여 그의 가족들을 대리고 떠나라고 합니다. 이들은 땅의 속물들을에 마음이 기울려져 머뭇거리고 있을 때 천사들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더하심으로서 롯의 아내와 그의 두 딸을 손을 붙잡고 성 밖으로 인도합니다. 가는 도중에 롯의 아내뒤로 돌아 보지 말라는 천사들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뒤를 돌아보아(26) 소금기둥이 되었다.(12-29).

 

아브라함은 아침에 주님께 소돔 위해 간구하면서 서 있었던 장소에로 가서 심판이 온 땅에 어떻게 떨어지는가를 보았고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하나님은 롯의 가족을 구출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뒤에도 딸들은 결혼 정년기가 너무지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32)"라는 그 시대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된 생각으로 아버지를 속여(37-38) 자식을 잉태하여 모압과 암몬의 족속이 생기게 되었다(30-38). 롯의 자녀들이 모암과 암몬자손들입니다.

 

현제 소돔과 고모라는 사해 부근의 지각 운동으로 땅이 가라앉자 물속에 잠겼다고 한다.

 

롯은 아브라함의 그늘아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습득을 하였습니다. 롯은 거룩하게 믿음으로 사는 것을 알았는데 소돔과 고모라에 가서 롯 역시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을 사람이 된 것입니다.

 

롯은 신판의 경고에도 자식들에도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전혀 영향력을 믿음으로 미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소돔의 강력한 부패성에 롯과 그의 가족은 소돔 화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불순종으로 가고 있자고 할지라고 성도가 세속화 되면 세상과 같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욕구를 충족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하여서는 안됩니다.

17: 28_9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로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영적인 욕구가 없이 인간의 본능적인 세상의 욕구에 축족하게 살아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욕구로 충만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서 풍요로운 소돔에 살면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삶을 살아야 할 영적인 욕구를 무시하고 영적인 감각을 무시하고 영적인 생활의 정지 된 것입니다.

세상적인 욕구가 자주 발달하여 영적인 욕구를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20장 아브라함의 속임

소돔의 심판을 격고 난후에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남방으로 이주하여 그 날땅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날 땅에 간 이유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땅에서 누리를 땅을 먼저 살펴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날 땅으로 옮겨 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2011절에 이곳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해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이때 가나안땅 그 날땅으로 들어오면서 아브라함의 삶의 태도는 혹시 이 사람들이 나를 죽일지 모르니 아내는 이쁘고 하여 누이처럼 행세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그랄 땅에서 새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랄에 있는 블레셋 왕 아비 멜렉도 바로와 같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였는데 아브라함은 또다시 바로에게 하는 버릇으로 자기의 아내를 누이라고 합니다. 아비 멜렉은 소아사아 지방에 살다가 가나안서곡지방에서 남부지방으로 이주하여 온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배를 만들어서 배를 잘 다루고 항해술이 뛰어난 관계로 지중해 연안을 잘 다스리는 아주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이때 사라가 90세가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아비 멜렉은 사라가 아름다워서 취할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유한 유목민인 아브라함과 결연을 맺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사건의 교훈(1-18) -12장에 아브라함 75세때에 기근으로 애굽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사건에 이어 두 번째 사건이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였을 때 꿈에(3) 하나님은 계시로 아브라함의 아내임을 알려 주셨고,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 보낼 것을 명령하셨다(7).

 

첫 번째의 사건은 약속의 땅 밖에서 발성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바르함의 자녀들이 약속의 땅 애굽에서 생사의 투쟁을 하게 되지만 아브라함처럼 서라가 보호를 애굽의 왕의 세력으로 보호를 받은 것처럼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받을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사건은 가나안땅에 아비멜렉의 왕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서도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생사의 투쟁을 하게 되지만 아브라함처럼 서라가 보호를 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보호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자 하나님이 꿈을 통하여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의 태를 닫으심으로서 결혼한 여자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아비 멜렉의 장면에서 우리는 이방 사람인 아비벨렉이 이스라엘 자손의 중재 없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야웨와 직접 교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사이의 논쟁은 소송과도 같다. 고소를 당한 아비멜렉은 자신을 변호하게 되고 그 결과 무좌함이 드러난다. 아브라함은 온전함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자신 을 변호한다(56).

이스라엘 중 아무 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마 8: 10). 여기서 아비 멜렉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갖지 못한 믿음의 본을 보이고 있다.

 

이 사실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14) 에게 많은 선물을 받고, 기도하여(17, 18)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18) 열어 주셨습니다. 이 교훈은 우리가 잘못해도(거짓말...) 선대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계획 즉 아브라함 아내 사라를 통하여 언약의 자손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내를 아비멜렉으로부터 다시 돌림 받게 하셨습니다(즉 구속사적인 해석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가축과 노비라 은 천세겔을 주시면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게 됩니다.

 

창세기 21

이삭의 출생의미

 

이삭의 출생은 모든 약속들이 성취됨을 뜻하며 모든 근심이 해결됨을 뜻한 것입니다.

이삭의 출생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아브라함과의 약속이 이삭의 육체를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2. 모든 근심이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의 의미인 하나님의 약속이 이삭의 육체를 통하여 성취됨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이삭의 출생은 자연스러운 과정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출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약속은 육체를 통하여 성취되어 출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성취는 두 가지를 강도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약속은 육체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1절 전반부 . 아마르)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1절 후반부 , 다바르)라는 이중적 후렴구로 시작하는 서두부분에 이 두 가지의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21: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였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시기가 되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우리는 두 가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앙에 크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히브리서는 죽은 자와 방불한’ (11: 11 - 12) 자들을 통해 약속이 성취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약속은 육체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도 약속대로 성취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부활의 약속은 우리의 새로운 육체를 통하여 성취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실천함에 있어서 항상 두 가지의 유혹에 직면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지나치게 영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착함으로써 출생의 육적인 현실을 경시하려는 유혹입니다.

두 번째는 출생의 현실을 지나치게 세속적인 방식으로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즉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가 예상하는 방식으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자기의 종을 양자로 삼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아내의 종 하갈을 통하여 낳은 자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예상한데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출생은 인간의 삶 속에 있는 가능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희망의 근거를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새로운 생명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 증거한 것입니다.

 

우리의 거듭남도 우리가 거룩함의 칭의론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 이삭의 출생의 의미

두 번째는 모든 근심이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삭의 이름으로 사라는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신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세 있는 말씀으로 아브라함에게 죽음과 절망과 불임의 올가미를 깨뜨리신 절망에서 웃음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웃음은 슬픔과 울음을 끝장낸다는 것입니다. (5 : 4, 6 : 21. 16: 20-24). 웃음은 절망과 사망에서 설명할 수 없는 새 창조,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성경적인 방식에 속한 것입니다. 웃음의 새 창조, 새로움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라는 충만한 기쁨’ (16: 24)이 있는 까닭에 이제는 사망과 죽음의 불임을 향해서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삭의 출생은 이스라엘의 역사가운데 늘 나타나는 형상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이스라엘의 운명이 바뀌는 것과 관련 되어 나타납니다.

시편 126편과 연결 짓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

시온의 포로를 돌리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포로상태가 끝남을 의미한 것입니다(29 : 14, 30 : 3, 33 : 7, 11, 26), 이삭의 출생은 사망과 저주의 왕국에 갇혀 있는 이스라엘의 사람들의 포로상황이 끝났음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 우리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는 찬양이 가득하다는 것임니다.

슬픔대신 우리에게 웃음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이삭의 이름의 의미입니다.

 

이삭이 젖을 뗄 무렵이 되자(8) 본문의 분위기는 바뀐 것입니다.

이제 약속의 아들과 여종 하갈에게서 난 두 아들의 갈등이 시작이 됩니다. 두 어머니의 갈등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사건으로 갈등을 맞이한다. 결국은 아스마엘과 하갈은 이 사건으로 내 쫓김을 당한다. (10)하나님은 왜 이스마엘을 내 좇앗을까? 이것은 하나님이 한 아들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이 아들을 선택하고 보전하려는 것입니다.

 

육체와 성령은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육체는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을 멸시 합니다. (5:16-18) 계집종과 큰 아들을 내 좇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육체의 위협을 가하는 것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합니다. (5: 16-18)

 

그러나 창세기 21장은 아브라함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아브라함의 갈등

이삭은 아브라함의 작은 아들이고 하갈에게서 낳은 자녀는 장자입니다. 현실에서는 장자에게 상속을 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약속의 자녀에게 상속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 아브라함을 갈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상속자인가? 큰 아들인가? 아니면 약속의 자녀인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상속자가 약속의 자녀랴는 것을 알리신다.

12-13절은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도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합니다. 이스마엘도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두 아들에 대한 역사는 자연인의 운명과 약속의 자녀들의 운명이다. 누가 상속자인가? 약속의 자녀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의 주석에서 하갈- 이스마엘, 사라- 이삭은 신학적인유형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내산의 자녀 인 하갈과 이스마엘은 계집종을 통하여 육체를 따라 태어 났습니다. (4:29-31) 필연성강제숙명(fate) 등의 자연의 왕국에서 산다. 장남인 이스마엘은 모든 자연적인 권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의 자격을 부여받은아들이다.

이들은 떡으로만 살려고 한다.

이스마엘은 이집트 여인간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활쏘는 자가 되었습니다.

 

시온 산의 자녀인 사라와 이삭은 약속의 자녀이다. 약송를 따라 태어난 상속인입니다. 이들은 선물자유운명(destin) 등의 은혜의 왕국에서 산다.

하나님의 기적안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자유와 기쁨에 이르는 길임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도 오심으로 약속이 성취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양자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약속의 성취로 양자된 이들은 약속의 자손들입니다.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 가운데 두 아들이 비유가 있다. (15: 11- 32),

큰아들

큰 이들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집안 규칙을 잘 따르는 까닭에 많은 것을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시내산을 상징한다(아마도 이스마엘의 경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은 아들

작은 아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생명을 선물로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