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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머래이 로마서 개요 이해하기

2018.09.04 08:45

admin 조회 수:27


  존 머래이 로마서 개요 이해하기


서론 - 15P

저자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30여 년 동안 조직신학을 가르치던 중 이 대작 로마서 주석을 위해 약 1년간 안식년까지 얻었으며, 자료 수집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에든버러와 글래스고에 있는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등 심혈을 기울여 집필에 몰두했다. 그래서 존 머래이의 명저가 로마서라고 해도 좋다.

저자의 개혁주의 사상과 학문적 업적, 뛰어난 통찰이 고스란히 담긴 주석이다. 존 머래이의 로마서 주석은 로마서의 저자, 목적, 내용, 배경 등을 명쾌하게 논평한 뒤에 그동안 학계에서 제기된 이슈들을 충분히 고려하며 텍스트를 정하여 상세히 주석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은혜에 의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은혜의 복음을 변호하고 논증한다.

바울이 지금까지 신봉했던 바리새주 율법의 종교는 죄와 사망을 채험한 종교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 하였느니라.[10;3]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바울은 자신을 사로 잡았던 바리새주 율법의 종교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롭게 되었다. [9:3-6, 26:12-18]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19]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7:10]

바울은 율법과 은혜, 믿음과 행위를 대조할 때 항상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전후를 설명을 한다.

또한 이 주석은 성경 원어를 모르는 독자들을 배려하여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고 원어와 관련된 논의는 각주에서 다룬 것이 특징이라고 할수 있다.

 

2. 저자와 장소

3. 로마교회

로마교회는 어떻게 설립이 되었는가? 로마교회안에 유대인들이 먼저 들어가서 설립한 교회이다. 16;3 18:2

 

4.본문의 개요

 

1) 1-8

 

1. 인사 1:1-7

2. 서론 1:8-15

3. 주제 1:16, 17

4. 죄와 정죄의 보편성 1:18-3:20

   1) 이방인의 경우 1:18-32

   2) 유대인의 경우 2:1-16

   3) 유대인의 정죄의 심각성 2:17-29

   4) 하나님의 신실함과 공의 3:1-8

   5) 결론 3:9-20

5. 하나님의 의 3:21-31

6. 구약의 확증 4:1-25

7. 칭의의 열매 5:1-11

8. 유추 5:12-21

9. 성화의 열매 6:1-23

   1) 은혜의 남용 6:1-11

    2) 거룩하게 된 자를 위한 명령 6:12-23

10. 율법에 대해 죽음 7:1-6

11. 과도의 체험 7:7-13

12. 신자의 갈등 7:14-25

13. 성령 안에 사는 삶 8:1-39

 

 

1-8 본문의 개요

 

로마서 13-4절은 복음을 잘 요약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탁월하게 정리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탁월하게 정리했다. 그가 로마에서 전하려고 한 것은 13-4절에서 핵심을 잘 정의한 복음이다(1:15). 바울이 로마로 가려고 한 유일한 이유는 복음과 이 복음의 열매를 향한 열정 때문이었다.

 

116-17절에서 선언된 주제는 어떤 형태로든 로마서 나머지 부분에서 다룬 내용 전부를 포괄한다.

 

(1:18-3:20)-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복음은 죄, 저주, 고통, 사망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다.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여 있음을 보여 주고자 했다.

 

인간의 타락 위에 하나님의 의가 개입했다. 복음의 영광은 하나님의 의가 복음을 통해 가장 더럽고 추한 죄와 비참에 처한 인간의 상황을 해결함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곧 임하게 될 그분의 진노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다. 이만큼 복음의 영광과 효력을 밝히 보여주는 말은 없다.

복음의 영광과 효력은 하나님의 의이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곧 임하게 될 그분의 진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다.

인간의 의는 종교의 본질로 드러 낼려고 한다.

  인간의 의는 하나님의 복음과 모순되는 이세상 종교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의만이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든다.

 

 로마서 321-26절에서 하나님의 의 주제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속과 그리스도의 피 안에 있는 화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의는 하나님의 칭의를 확보해 준다. 화목은 하나님이 그분의 의를 경건하지 않는 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분임을 말해주는 하나님의 대책이다. 하나님의 의라는 이 주제는 515-21절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이 의는 그리스도의 위와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17, 18, 19)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는 의를 통해 역사한다(21)

 

 바울은 계속 믿음을 강조한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1:16) 이다 (1:17; 3:22) 그러므로 이 의는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의 효력이 발생한다. 하나님이 주신 의라면 그것은 복음을 통한 믿음을 통해 얻은 의다. 하나님의 의와 믿음은 이 둘은 본질적으로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잇다. 믿음은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이 의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믿음과 하나님의 의는 자기포기하는 것이다. 믿음은 자신를 포기하고 자기의 포기에서 눈을 돌려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한다.

 

 자신의 포기와 죽음으로 눈을 돌림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죄에 대해 죽게된다.(6:3-5) 죄의 권능은 율법인데,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율법에 대해 죽었다면(7:4) 또한 죄에 대해서도 죽은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서 은혜의 지배 아래로 들어오게 되었고 죄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6:14) 이것이 성화의 기초이며 보증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셧다. 이것이 우리의 칭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 또한 그와 더불어 죽었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우리의 성화를 보증받게 된다.

 

 로마서 61절에서 76절까지는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고 죄의 지배에서 벗어낫으며 예수의 부활로 생명이 새롭게 되었음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이로써 우리는 믿는 자들이 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온전히 거룩한 자가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로마서 714-25절의 갈등은 그러한 생각이 오해임을 알려준다. 이런 갈등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다시 작용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 절망적인 투쟁은 아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7:24,25) 이것은 부끄럽지 않은 소망 안에서의 승리의 외침이다.

로마서 8장에서 부연 설명된 것도 바로 이 확신이다. 신자가 지신 안에 있는 죄와의 갈등을 종식시키지 못하는 이상, 순례의 길을 둘러싸고 있는 갈등의 종식은 물론 대적들과의 갈등의 종식도 없다. 로마서 8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또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는 자를 통해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넓이는 창세전에 있었던 선택에서 시작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받는 완성의 순간에까지 이른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도록 미리 예정되엇으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화롭게 될 것이다(8:17, 28-30)

 

 

2) 9-16

 

14. 이스라엘의 불신앙 9:1-5

15. 하나님의 신실성과 의의 변호 9:6-33

16. 믿음의 의 10:1-21

17. 이스라엘의 회복 11:1-36

   1) 남은 자와 그 나머지 11:1-10

   2)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 11:11-24

   3)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이스라엘의 회복 11:25-32

   4) 송영 11:33-36

18.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 12:1-15:13

   1) 실제적인 의무들 12:1-21

   2) 국가의 관원 13:1-7

   3) 사랑의 우선성 13:8-10

   4) 임박한 종말 13:11-14

   5) 약한 자와 강한 자 14:1-23

   6) 그리스도의 모범 15:1-6

   7) 하나가 된 유대인과 이방인 15:7-13

19. 이방인을 위한 바울의 사역,정책,계획 15:14-33

20. 인사와 마지막 송영 16:1-27

   1) 바울의 인사 16:1-16

   2) 속이는 자에 대한 경고 16:17-20

   3) 친구들의 인사 16:21-23

   4) 송영 16:25-27

 

 

 9-11장의 기록 목적은 무엇인가? 116-17절에서 언급된 논지를 결정적으로 변호하고 있고, 나아가서는 1-8장에서 설명된 교리와 상호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로마서에서 이 부분이 없다면, 여러 질문을 그냥 방치하고 그에 따른 혼란을 초래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거나 기대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위대한 저자께서 사도 바울에게 영감을 주어 이 서신의 위대한 주제와 관련된 질문들, 지성적인 독자들이 제기하는 절박한 질문들을 다루게 하신 것은 너무나 감사할 뿐이다.

 

  9-11장에서 답한 것은 로마서에서 나온 문제들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성경 전체에서 나오는 성경적. 신학적 관점이 필연적으로 제가하는 질문들이다. . 바울이 구약에 호소한 이유는 그가 다루는 주제들이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의 해석 및 적용에 비추어 그것들을 이해해야 한다. 즉 사도는 그리스도의 강림이 초래한 완전한 성취의 빛 안에서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의 영감을 받아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언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오리엔테이션을 제공하고 있다.

 

9-11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범세계적인 계획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장들은 신약의 계시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방식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다양한 섭리가 그분의 구원 계획을 위해 상호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울은 이런 모습을 묘사하면서 1132절에서 최절정에 이른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과 더불어 경이감을 느끼며 다음과 같은 놀라운 선언을 하게 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이 부분의 이 결론에서 바울이 그처럼 굉장한 찬양과 송영을 터뜨렸다는 것 자체가 9-11장의 주제는 아프이 여덟 자에서 개진된 복음의 논지에 어울리는 후속편임을 말해준다.

 

 9장의 서두에서 제기된 질문은 이 서신의 주제를 표현하는 말에서 나온 문제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16)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이 우선성은 이스라엘의 대규모 불신과 배교와 상충되는 듯이 보인다. 역사의 흐름을 보면 정말 유대인이 우선권을 갖고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유대인의 불신앙이 제기하는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 자체가 로마서 9-11장의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논리적 일관성의 유일한 배경은 아니다. 앞에 나오는 장들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 했으며(4:11). 이 문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가리키기도 했다(4:13) 이 약속의 모든 함축적 의미가 이런 언급이  나오는 문맥에서 다 다뤄진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함축적인 의미가 잊혀지거나 그와 관련된 문제들이 제거될 수는 없다. 그래서 9장에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가리킨다.

 

 9-11장에서 사도는 이 서신의 전반부의 주제들에게 나오는 문제들을 다룬다. 이것들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대답을 요악하면 이렇다.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준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나온 모든 육신적 후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진정한 이스라엘에게 준 것이며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목적은 변함이 없다(9:6-13). 은혜의 선택에 따른 남은 자는 언제나 있는 법이다(11:5,7) 남은 자 가운데서 약속의 말씀은 성취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수포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대규모 불신앙과 그들이 버림받는 문제에 대한 첫째 답변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것이 답변의 전부는 아니다. 사도는 11장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또 다른 측면을 설명한다.

 

 9장에서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배척이 총체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기에는 남은 자가 있었다. 1111-32절에서 바울은 1125저에서 그가 "이 비밀"이라고 부른 것, 곧 이스라엘의 반역이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밝힌다. 아브라함의 언약에는 모든 세대에 남은 자가 보존된다는 것 이외의 또 다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데, 이는 장래에 입증될 것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결과로서,하나님께서는 하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은총과 사랑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상들 덕분에 사랑을 받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에서 멀어져 있지만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11:28). 94-5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특권은 여전히 유효하다."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이다(11:29). 언약의 약속에 함축된 의미에 걸맞게 이스라엘은 장차 믿음과 복음의 축복을 회복하게 될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그들의 충만함"이라 부른다(11:12). 이 충만함은 그들의 허물고 상실과 대조된다. 그것은 그만한 규모가 장차 정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부르고 이것은 그들을 "버리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11:15) 이것은 그들을 원래의 감람나무에 다시 접붙이는 일이다(11:23-24) 끝으로, 그 회복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11:26)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예언 및 약속을 이렇게 설명하면서 바울은 이스라엘과 관련된 아브라함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고 또 진실로 입증될 것인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의 다양한 국면과 얽혀있는지도 보여 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며,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며, 이스라엘의 버림받음이 세상의 화목이다(11:12, 15) 또 이스라엘의 충만함과 그들을 받아들임이 이방 세계에게는 비할데 없이 큰 축복이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이방인들에게 귀속되는 축복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충만함과 회복으로부터 이방인들에게 귀속되는 축복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방인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질투를 유발하고(11:11),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종지부를 찍게 한다(11:25)

 이와같이 하나님의 구원 목적의 실현을 위한 하나님의 범세계적인 계획의 전모가 밝혀졌다. 11장이 말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역사철학에 대한 통찰이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얻게 된다면 바울과 같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11:33)라고 외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서신에서 12-16장이 8장 바로 뒤에 나왔더라면, 우리가 예상했을 법한 순서와 일치했을 것이다. 이제 곧 살펴보겠지만, 121절부터 1513절에 이르는 단락은 신자들에게 부과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의무를 다룬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특히 공동체 내에서의 상호관계와 성도의 교제이다. 또한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 및 다른 조직과도 관계를 맺기 때문에 바울은 사회적.정치적 책임을 수행할 때 취해야 할 성도다운 행위를 다룬다. 15장 후반부에서는 이방인 사역을 위한 선교 정책 및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의 교회나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바울은 로마 교회를 세운 사람이 아니기에,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의 정책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되 담대하게 쓴데 대한 변명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참고. 15:15) 그러나 이 서신이 제공하는 증거는 그런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서두에서 보면, 바울은 로마를 방문하고자 하는 열망의 성취가 지연된 데 대해 변명했다(1:11-13).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15) 그리고 15장에서 동일한 주제를 재개할 기회를 잡아 그의 열망과 의도의 실행이 지연된 데 대한 보충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15:22-26) 더욱이 16장의 인사가 보여주듯, 바울은 로마에 많은 친구들을 두고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는 복음 사역에 동참한 가까운 동료들도 있었다. 이 친구들과 특히 동역자인 아굴라와 브리스가 같은 이들은 바울이 로마에 오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열망을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도 공유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취지를 담은 긴급한 의사소통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1장에 나오는 열망과 목적에 대한 확신이 15장에서 다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사도가 그의 선교정책 및 계획을 말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로마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를 위한 순회여행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럽의 서쪽 지방까지 선교사역을 확장하려는 큰 비전에 비추어 보면, 그의 로마 방문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15:28) 그것만이 아니다. 그곳에 있는 성도들이 바울의 방문 목적이나 기간에 관해 그릇된 생각을 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울의 로마 방문 성격을 명백히 밝혀둘 필요가 있기도 했다. 로마는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들르는 정박지일 뿐이었고, 로마 교회는 바울을 새로운 선교 개척지로 보내게 될 것이었다.(15:24, 28)

 

 16장은 주로 인사로 채워져 있다(16:1-16; 21-23). 복음을 어지럽게 하는 자에 대한 최종 경고가 있으며(16:17-20), 마지막에 나오는 송영은 그 길이나 내용이 이 서신의 전반적인 성격 및 범위와 잘 일치한다(16:2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