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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사랑과 정의가 어떻게 조화를?

2018.05.14 07:55

admin 조회 수:9


사랑과 정의

정의로운 사랑이 가능한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요약

 

저자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자소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WOLTERSTORFF)는 세계 철학계에서 활약하는 대표적 기독교 철학자다.

1932년 미국 미네소타 비글로우에서 태어나, 캘빈 칼리지(B.A.)와 하버드 대학교(PH.D.)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모교인 캘빈 칼리지에서 30, 예일 대학교에서 21년간 가르쳤으며 하버드, 프린스턴, 옥스퍼드, 노터데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등에서 방문 교수로 가르쳤다. 2001년 예일 대학교 노아 포터 석좌교수직에서 은퇴한 후, 버지니아 대학교 고등문화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철학회 회장과 미국기독교철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옥스퍼드의 와일드 강좌와 세인트앤드루스의 기포드 강좌 등에 초빙되어 강의했다.

월터스토프는 197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분리 정책이 가져온 해악과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고통을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계기로 정의론 탐구에 매진해 왔다. 1981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카이퍼 강좌를 맡아 기독교는 세계를 형성하고 개혁하는 종교임을 역설했고, 이를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IVP)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2008년에 기독교 전통에서 얻은 통찰을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논증한 정의론을 JUSTICE: RIGHTS AND WRONGS에 담아냈고, 2011년에는 사랑과 정의가 대립한다는 통상적 이해에 반박하는 이 책 사랑과 정의를 저술했으며, 2013년에는 정의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과 여정을 자전적으로 보여 주는 월터스토프 하나님의 정의(복있는사람)를 출간했다.

그 외에도 미학, 존재론, 인식론, 교육 철학, 신학, 기독교 철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폭넓은 관심으로 성실하게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그 밖에 행동하는 예술(IVP), 종교의 한계 안에서의 이성(성광문화사),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좋은씨앗), 샬롬을 위한 교육(SFC출판부), ON UNIVERSLAS, DIVINE DISCOURSE, THOMAS REID AND THE STORY OF EPISTEMOLOGY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역자 : 홍종락(옮김)
역자 홍종락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사랑의집짓기운동연합회에서 4년간 일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으며, 번역하며 배운 내용을 자기 글로 풀어낼 궁리를 하고 산다. 저서로 나니아 나라를 찾아서(정영훈 공저, 홍성사)가 있고, 역서로는 한나의 아이』『루터와 이발사』『우물 밖에서 찾은 분별의 지혜』『즐거운 망명자』『예수님이 차려주신 밥상』『마음 뇌 영혼 신』『하나님이 내게 편지를 보내셨어요』『기억의 종말(이상 IVP),개인기도』『루이스와 톨킨』『루이스와 잭』『성령을 아는 지식』『영광의 무게(이상 홍성사)수상한 소문』『어둠 속의 비밀(이상 포이에마)올 댓 바이블』『C. S. 루이스』『세이빙 다빈치(이상 복있는사람) 등이 있다. ‘2009 CTK(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국판) 번역자 대상, 2014년 한국기독교출판협회 선정 올해의 역자상을 수상했다.

서문


사랑과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가장 흔히 쓰이는 수식어이지만, 기독교 전통은 둘이 서로 충돌하며 그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이해해 왔다. 기존 하나만을 주장하는 아가페주의를 구축한 키에르케고어·니그렌·니버의 한계를 월터스토프는 지적하고, 독자적 대안을 제시한다. 정의로운 사랑이 가능함과 하나님의 사랑이 정의로움을 논증하는 학문적 성과를 거둘 뿐 아니라, 복음에 대한 이해를 혁신하고 정의와 사랑 모두를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온전한 삶의 지향을 보여 준다.

 

1 서론 p17

 

사랑으로 행하는 것은 정의의 요구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고, 정의의 요구에 따라 행하는 것은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과 생각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만연해 있다.

 

정의-명령과 사랑-명령 사이의 갈등을 인지한 일부 저자들은 정의보다 사랑을 선호하는 식으로 반응한다. 그들은 우리의 도덕 문화에서 정의 개념을 제거하자고 하거나, 둘 사이에 충돌이 있을 때마다 정의보다 사랑에 우선권을 주자고 하거나, 정의 범주의 사용을 신중하게 한정한 소수의 상황으로 제한하자고 제안한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반응하며 사랑보다 정의를 선호하는 저자들도 있다.
둘 사이에 긴장이 있다는 인식이 곧 두 명령을 잘못 이해했다는 신호라고 주장하려 한다. 두 명령이 서로 온전히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사랑을 이해하는 길과 정의를 이해하는 길을 제안하고 논의하고자 한다.

두 명령은 충돌하지 않는다. 둘이 충돌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의-명령에서 정의를 , 또는 사랑-명려에서 사랑을 또는 둘을 오해 했기 때문이다.

아가페 구조와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 세가지의 대안적 윤리적 관점은 이기주의 행복주의 공리주의와 대조하는 것이다.

 

용어이해

안녕--그에게 좋은 그자신의 행동과 모두에 대하여 안녕과 선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안녕을 증진시킨 세가지의규칙-이기주의, 행복주의, 공리주의

이기주의-사람이 그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해야하는 안녕과 선은 자신의 안녕과 선을 말한다.

잘 사는 인생은 온전히 자기애로 욺직이는 삶이다.

행복주의, -본인의 안녕 증진을 위한 수단으로서 다른 사람의 안녕을 추구할 때 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타인의 안녕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추구할때도 안녕이 커지는 형상을 경험한다.

행복은 활동이다. 행복은 삶이고 삶은 행위의 실현이다. 어떤 신체적 외부적 선도 그 자체는 행위가 아니며 활동도 아니다.

한사람의 삶이 휼륭함을 결정할때는 무엇을 하는가 뿐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

공리주의

 

이기주의, 행복주의, 공리주의 세관점이 실패하는 이유?P31

크라우투스- 주요철학적 윤리체계의 실패를 거론하며 이렇게 말한다.-모든 주요철학적 윤리체계의 실패

그 체계들이 대답하고자 하는 질문은 무나 폭 넓고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다. 찰학은 폭넓고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일을 한다. 사람들이 처하는 상황이 없이 누구의 선을 증진해야하는 모든 사람에게 말해 줄 공식이 필요하지 않다.

아가페 주의의 사랑하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말은 누군가의 안녕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증진하려한다는 뜻이다.

아가페주의 기원은 모세오경의 명령과 유대주의 토라의 핵심에 있다. 사랑-명령의 의미를 깊이 숙고하는 전통이다.

이웃인 누군가의 어떵 삶 선 자체를 목적으로 할 때, 다른 사람의 삶-선을 감소시켜서는 안된다.


1부 자비-아가페주의
2 현대 아가페주의
현대 아가페주의 등장은 쇠안 키에르케고어를 19세기의 위대한 시조로 삼는다.

신약의 아가페는 정이의 요구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선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증진하려 드는 형태의 사랑의 일종이라고 여겼다.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을 기독교적인 사랑이라고 불렸다.

1930년 루터교 주교 안데르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첵을 비판하였다. 니그렌은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수를 잘못해석을 하였다. 신약성경을 잘못해석을 하였다. 니그렌의 주장인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사랑을 이르킨다는 결정론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비판한다.

그러나 니그렌의 주장은 옹호할 가치가 있다. 두자기의 면에서 그렇다.

1]니그렌의 영향력이다. 아가페의 틀이 되는 구약의 해석을 필요할 경우는 다루어야 한다.

2]니그렌의 체계적인 엄밀성이다.

사랑의 대상이 타인일 때 사랑의 대상에서 자기를 포함시키지 않은 사랑 자비와 관대함, 자기 희생적사랑-사랑을 자비로 보는 해석-이스라엘 백성의 국가적인 삶은 언약에 근거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 언약을 평가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의다.

상호적사랑-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추구하는 사랑

니그렌- 하나님의 사랑은 자발적이고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로 인간의 본성에 무한한 가치 안에서 적절한 동기를 발견한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죄를 눈감아 주는 것보다 더 선물을 수여하는 것이다.

아가패 사랑의 동기는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에게 주시는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어는 기독교의 사랑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부과하신 의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의무로 사랑하는 것이다.

 

정의란- 누군가가 자기의 몫을 빼앗을 경우 곧장 정의가 개입한다. 모두가 자기의 권리,자기의 정당한 몫을 가지는 공통의 안전을 보당하는 것이 정의다.

 

아가페 사랑이 다른형태의 사랑들과 공존할수 있는가? p63

니그렌은 그렇게 못한다. 아가페 사랑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에로스는 언제나 사랑하는 주체가 지닌 어떤 욕구의 만족을 추구한다. 에로스 안에는 늘 자기애의 기미가 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타인의 번영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뿐 그것이 자신의 번영에 끼칠 영향은 전혀고려하지 않는다.

배우자를 시실하고 다정하게 사랑하라. 그러나 배우자에 대한 이웃 사랑이 하나님과 언약한 부부관계를 거룩하게 하는 요소가 되게하라. 친구를 진실하고 헌신적으로 사랑하라. 그러나 하나님과 신뢰에 찬 관계를 나누는 우정가운데 서로를 통해 친구에 대한 이웃사랑을 배우게 하라.

 

사랑을 아가페로 하는 사람이 편애 할수 있는가?p72

자녀를 운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아가페 사랑을 온전히 보유하지 못한 결론

 

사랑의 종류의 구분 p76

끌림의 사랑-무언가에 붙들리고 끌리고 이끌리는 것 동물 식물 정치 등등

애착의 사랑- 내아이 내집 내 고양이 등 끌리는 것보다 나와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

자비의 사랑-끌림과 애착이 없어도 상대의 번역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 성경에서의 사랑은 끌림과 애착의 사랑이 아니라 순수한 자비다.

 

3 고전적 현대 아가페

아가페주의가 바라보는 사랑과 정의의 관계

아가페 사랑은 정의의 요구에 따른 행동을 배재한다.p83

정의의 요구에 따라 다른 사람을 대한다면 아가페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아가페 사랑의 특징은 자발성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전적으로 자발성이다. 자발성 때문에 정의의 요구를 본질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1등한 사람에게 1등에 상을한 상을 주어야 한다. 의무도 여기는 자발성이 사라진다.

 

왜 아가페 사랑은 자발성인가? p85

아가페는는 가치를 창조하는 원리다. 죄인이 용서를 받는 것은 그안에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를 가치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여서다. 아가페는 죄인에게 가치를 창조하는 원리다.

 

정의의 추구과 하나님의 사랑이 공존할수 있는가?

니그렌의 입장

예수님은 교제를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과 교제하신다. 에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하나님과의 교제를 정의의 원리로 규제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스린다.

우리는 정의의 요구에 따라 이웃을 대하신 대신 그들을 아가페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무어 때문에 니그렌은 그런 강경한 관점에 이르럿을까?

 


4장 고전적 현대 아가페주의의 아이러니와 불가능성

 

고전적 현대 아가페주의는 우리가 모든 이웃을 항상 아가페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하고, 정의의 요구에 따라 누군가를 대하는 것은 아가페 사랑의 사례가 아니라고 이해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런 아가페 사랑이 불의를 저지를 수 있음을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아가페주의자들은 곤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아가페적으로 사랑하면서 그를 불의하게 대한다면, 그렇게 대우받지 않을 그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그가 그런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다면, 나는 마땅히 그를 그렇게 대우하지 말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누군가 나에게 그런 식의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다면, 나는 그에 대해 그를 그렇게 대하지 말아야 할 상관적 의무를 갖게 된다. 아가페주의자의 관점은 내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이 때로는 허용된다고 본다. 때로는 마땅히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조차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옳을 수가 없다. 고전적 현대 아가페주의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5 니버의 비고전적 아가페주의
니버는 갈등 상황에서 사랑이 아니라 정의의 편을 택하라고 말한다. 사랑은 갈등이 없는 상황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가장 힘주어 말씀하신 것은 갈등 상황에서 사랑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되 그 이웃이 나의 원수여도, 그가 나를 부당하게 대하고 그 일을 뉘우치지 않아도 사랑하라 하셨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으라. 갈등이 없는 상황에서뿐 아니라 갈등 상황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라.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으로 볼 때 니버의 입장은 어딘가 심각하게 비뚤어졌다.

 

2부 배려-아가페주의

6 사랑으로서의 정의

누군가의 안녕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증진하려 하는 것이 사랑의 한 가지 형태이다.

윤리체계는 어떤 조건에서 누구를 사랑해도 되거나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수 있다.

안녕- 선 개념-행복주의 안녕

삶의 선의 개념- 옳은 일을 하는 것 해서는 안된 일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삶에 있어서 선이다..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정의롭게 대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순수한 아가페 주의는 정의의 원리로 보완 될 때만 비로서 적합한 도덕이 된다.


7 정의란 무엇인가?

울피아 누스는 정의란? 각자게 그 이우스를 돌려주는 항구적의지라고 했다.

구성원들이 각자 이우스를 받는 사회는 정의롭다.

라틴어 이우스는 사람의 권리.응분의 몫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킨다.

의무의 이면이 지책이다. 누군가를 마땅히 대해야 할 방식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나는 죄책이다.

누려야할 권리? 권리는 본인과 타인사이에 규범적 우대이다.

특정한 방식으로 대우를 받은 삶-선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

당신의 행동이 아무리 많은 삶-선을 이룰 것으로 예상이 되어도 그 선들을 가져오기 위해서 누군가로부터 그의 최종적 권리를 박탈한다면 최종적인 의무를 어기어야 한다면 당신은 그일을 해서는 안된다.


8 사랑을 다시 생각하다 p171

사랑은 그 사람의 본인과 타인에게 정의로운 대우를 받는 것,즉 그의 권리가 존중을 받고 그가 그의 가치에 맞은 방식으로 대우를 맏는 것을 추구한다.

신약의 아가페는 상대의 선의 증진과 그의 가치에 합당한 존중확보를 동시에 추구한다.

칸트는 가기애를 주로 자기의 성향과 욕망을 체우는 일에 이끌려사는 사람들은 언제가 그의 성향과 욕망중에서 그 순간에 가장 강하게 다가오는 것에 자열스럽게 이끌린다.

프랭크퍼트는 이것을 자기애가 아니라 방종이라고 생각을 한다.

프랭크퍼트 사랑은 누군가가 부당하게 대우를 받는데도 무관심하다면 그 자체가 그사람을 목독하는 것이다.

사랑의 계명과 황금율

알츠 하이머의 환자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 더 이상 인간으로서 기능할 능력이 없다. 자사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애 심각하게 망가졌다.

6:31너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한데로 너는 남을 대접하라.

황금율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기를 바라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옛계명이 사랑의 계명으로 대치가 되었다.


9 배려로서의 사랑

간단히 말해, 신약의 아가페에 대한 이상적 해석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킬 것이다. 첫째, 정의의 요구에 따라 누군가를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사랑의 한 가지 사례가 되도록 사랑을 이해할 것이다. 둘째,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할 사랑, 우리가 흔히 자신에 대해 갖는 사랑, 우리가 이웃에 대해 가져야 할 사랑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그런 통합적 이해에 이르는 길로 이미 상당히 나아갔다. 배려로서의 사랑은 정의가 요구하는 바를 행하는 것을 아우른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갖는 사랑과 이웃에 대해 가져야 할 사랑은 배려로서의 사랑이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할 사랑을 배려로 이해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 남았다.


10 배려의 동기는 중요한가?
다양한 이유와 동기로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

지금은 배려의 적용규칙을 만들어야할 때이다.

키에르케고르 누군가 이웃을 인정하는 것에 의무에 대한 인정을 더하여야 한다.

애착의 사랑이나 끌림의 사랑두가지의 형태의 사랑이 불러 일으키는 자비의 사랑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니그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주입되는 것을 더하여야 한다. 러나

스코틀렌드의 도덕적이론가들은 도덕적감정을 강조한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나는 사람에게 애착을 하게 된 것은 끌리는 사랑도 아니고 공감이 마음을 움직었다. 이웃을 배려하는 거가운데 공감이 중요하다.

11 배려의 적용 규칙

두가지의 규칙이 있다.

1]안녕의 원리

2]공리주의 극대화이다.

5:39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 빰을 치거든, 왼쪽마저 돌려 대라

42네게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네게 꾸려고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

예수님의 사랑의 윤리와 상호주의 원칙을 거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5:21-22절 살인하지 말라는 말과 살인은 물론이고 이웃에게 성을 내서되 안되고 그들을 목욕해서도 안된다.

예수님의 사랑의 윤리와 상호주의 원칙을 거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상호주의 원칙은 두가지의 측면이 있다.

나에게 호의를 배풀면 나도 호의를 배푸는 것이다. 상호주의 원칙을 거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을 받을 것이 무어냐?

누가 나에게 악을 행하면 악으로 갚아 주어야 한다. -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


12 두 가지 인상 바로잡기

개인주의 인상 바로잡기

사회적실체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한다.

 

사회적 실체는 거듭 노예의 지위에서 벗어난다. 그것들이 우리를 섬기는 대신 우리가 그것들을 섬긴다. 우리는 그것들이 본질적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복의 범위와 눈부신 재화가 제국의 위대함에 기여한다고 판단할 뿐, 그 정복과 부가 사람들의 번영과 사람들 사이의 정의가 향상하는 데 과연 기여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회적 실체에 본질적 가치를 부여하면 그 실체의 번영 또는 우리가 그 실체의 번영이라 여기는 무엇 자체가 우리 행동의 구조에서 목적이 되어 버린다. 우리가 국가·단체·클럽을 섬기게 되어 버린다. J. F.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이 유명한 선언을 했다. “여러분의 나라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마시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이것은 엉터리 구분이다. 물론 나는 이 나라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만 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대안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자신을 나라에 바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나라가 국내외에서 사람들의 번영과 그들 사이의 정의에 봉사하는 상황이 조성되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중심주의라는 인상 바로잡기

동물식물- 동물학대등 부당한 행위를 할 수가 없다.


13 배려-아가페주의는 너무 쉬운가?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그들의 가치를 존중하도록 하는 것으로 족하다.

죄인들에게 위로를 하는 것 정도 죄인들을 석방하는 일에 힘을쓰라는 말이 아니다.

배려와 아가페주의는 타인의 선과 권리를 찾아 내기위하여 노력하고 자신이 증진해야 할 선을 증진하며 마당히 보장해야할 권리를 보장한다.

 

14 사랑, 정의,

세 가지의 근본 선의 지향은 선행 인정 투입이다.
선을 창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미 있는 선을 존중하는 것도 주요하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애착을 느끼는 사랑하는 것과 사랑의 감정을 투입하는 것

정의의 시행은 선행과 인정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애착으로 나타난 투입은 배려의 방식으으로 성행을 불러 이르킨다.

 

3부 정의로운 사랑과 불의한 사랑
15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는 행동에서 생겨나는 불가피한 피해에 대하여 꼭 필요한 교정조치다.

예측 불능에 대한 교정정책은 ?

용서는 과거의 행동을 원상태로 돌리는 역활을 한다.

 

용서는 정의를 침해하는가?

용서는 형벌의 포기를 요구한다.

정의요구는 잘못된 자가 벌을 받는 것이다.

 

용서에 대한 만족스러운 이론은 그리스월드가 분명하게 거부하는 바와 달리, 자신이 당한 잘못에 대한 부정적 감정과 부당 행위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구분해야 한다. 부당 행위자를 온전히 용서하면서도 그가 한 일에는 계속 분노할 수 있다. 만족스러운 용서의 이론이라면 이런 까다로운 균형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하고, 이 균형잡기가 필요한(혹은 필요치 않은)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누군가를 그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 잘못을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취급하는 것이라고 어떤 저자들은 주장한다. 나는 이것이 맞지 않다고 본다. 누군가가 한 일에 대해 그를 봐줄 때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용서는 그 행위를 없었던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 행위자를 그 행위로 인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16 용서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무슨 의미를 갖는가?

17 용서는 정의를 침해하는가?

히브리성서와 기독교성서는 곳곳에서 하나님을 인간에게 법을 내리시고 그 법을 어길 시 제재를 명하시는 분으로 제시하며, 그런 법과 제재에 회개-예외가 붙는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참회하는 죄인에게 완전하고 온전한 용서를 베푸시는 분으로도 제시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신뢰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나의 논증은, 이것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원리라면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제재의 억제적 기능이 훼손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딜레마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렇게 불러도 된다면, 하나님의 사법 제도(justice system)는 억제력의 관점이 아니라 질책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그 일에 대한 비난이자 진노의 표현이다. 앞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온전하고 완전하게 용서하려면 질책적 형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형벌 포기 자체가 정의를 침해하거나 훼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확인했다.


18 정의로운 관대함과 불의한 관대함

포도원 주인은 그렇게 특이한 방식으로 관대함을 베풀게 된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다. 아니, 그 어떤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관대하게 행동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을 뿐이다. 우리가 보았다시피, 선별적 관대함은 그 선택에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이유가 없다 해도 정의로울 수 있다. 일찍 온 일꾼들은 주인이 각 일꾼에게 일한 만큼 지불하고, 굳이 관대함을 보이고 싶다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크기의 선물을 하길 바랐다. 노동의 길이와 강도에 선물의 크기를 맞추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방식들을 크게 선호했다고 해도, 주인이 그것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그들을 부당하게 대우한 일이라는 결론이 따라오지는 않는다.


19 정의로운 온정적 간섭주의와 불의한 온정적 간섭주의

내 논의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이웃에 대한 아가페주의자의 배려에는 이웃이 정의로운 대우를 받게 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게 하는 것이 포함된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아가페주의자는 국가를 상대로 시민들이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할 권리,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권리, 집회의 권리, 재판을 받을(habeas corpus) 권리, 고문받지 않을 권리 등을 보유함을 인정한다. 그는 이런 권리들 및 그와 같은 여러 다른 권리들을 무시한 것이 수 세기에 걸쳐 오도된 사랑과 기형적 배려의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의 출발점이라고 본다.


4부 하나님의 사랑의 정의


20 로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관대함의 정의

로마서 해석가들은 로마서의 주제가 유스티티아데이”[하나니의 정의]라고 말한ek.

개신교는 로마서의 주제가 개인구원이라고 말한다.

로마서의 주제인 보음이란? 무엇인가.?

유대인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디카이오수네]이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믿음을 가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능력을 수행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디카이오수네]이다.

톱라이트는 하나님의 능력은 언약의 신실성으로 해석을 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은 공정한 하나님의 칭의의 분배를 말하기도 한다.

 


21 칭의란 무엇이며 그것은 정의로운가?

물론, 나도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간략하게 논하면서 한 말에 대한 라이트의 생각에 동의한다. 여기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믿음이 그들의 디카이오수네로 여겨질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뿐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그 언약의 내용에 담긴 정의(justice)라고 생각한다. 329-30절에서 바울은 언약의 내용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의롭다 하시는 이유가 그런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데 주목하라! 바울은 약속의 내용을 지지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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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여러사람들의 평가를 이렇게 싫습니다.

 

기존의 이해를 극복하고 사랑과 정의의 조화를 증명하는 신선하고도 치밀한 통찰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은 불의하다는 말을, 정의에 집중하는 사람은 무정하다는 비판을 듣는다. 두 가치가 갈등하는 듯한 사례들에 대해 키에르케고어와 니그렌은 정의 대신 사랑을 택하라 말했고, 니버는 종국에는 사랑이 더 중요하지만 삶에서는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월터스토프는, 갈등으로 보이는 그 사례들은 기형적 사랑과 기형적 정의가 나타난 현장이며, 온전한 사랑과 온전한 정의는 서로 침해하지도 배제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자비-아가페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배려-아가페주의를 제안하며, 사랑은 정의를 구현하며 정의는 사랑의 실천 사례임을,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랑이 가능함을 논증한다.

이론과 실천, 이해와 적용을 아우르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논증
죄인에 대한 용서, 처벌의 경감은 과연 정의로운가? 포도원 일꾼의 비유와 같은 관대한 분배의 사례는 부당하지 않은가? 온정적 간섭주의로 드러나는 아가페 사랑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사랑과 정의의 이론뿐 아니라 그 적용에 대해서도 논쟁적 질문은 끊이지 않는다. 월터스토프는 고전적 견해와 성경의 비유와 일상적 사례를 두루 짚어 가며 아가페 사랑의 구체적 실천이 정의로울 수 있는지 엄밀하게 살핀다. 이론과 실천, 이해와 적용을 아우르는 정교한 논증을 통해, 불의가 가득한 오늘날의 삶에서도 우리가 정의롭게 사랑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칭의라는 정의로운 사랑을 받은 새로운 정체성에 합당한 정의로운 삶으로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차별 없는관대함이 불의하다는 유대인들의 항의에 논박하고, 칭의가 율법폐기주의를 조장하고 정의의 실천을 약화시킨다는 문제 제기에 답했다. 로마서의 디카이오수네’(dikaiosun?)를 중세 이후 학자들은 , N.T.라이트는 언약적 신실성으로 이해했지만, 월터스토프는 바울이 강조한 것이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언약의 정의로움이라고 논증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근거로 죄의 기소를 기각해 차별 없이칭의를 베푸셨다. 월터스토프는, 그런 정의로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새로운 정체성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삭막하고 불의한 시대를 위한 대중 교양 철학서
사랑과 정의의 이야기가 낭만이상의 영역으로 밀려난 삭막하고 불의한 시대에도, 정의를 향한 갈망은 촛불정국과 최근의 인문학 열풍에서도 드러나듯 뚜렷이 살아 있다. 그러나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는 한국 교회의 정치적 판단은 사회의 정의 기준과 어긋날 때가 많았다. 그렇기에, 월터스토프가 불의의 현장에서 점화된 문제의식과 개혁주의 전통의 탄탄한 기반으로 꾸준히 탐구해 온 정의론은 우리에게 절실하다. 정교하고 촘촘한 논증으로 거침없이 난제를 풀어 가면서도 가까운 일상의 사례를 평이한 문체로 엮어 낸 월터스토프의 사랑과 정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교양 철학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